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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r 23. 2021

영화를 보다 바람이 났다

강원도 입춘 여행기 1

벌써 입춘이다

두 번째 휴직도  한주 남았다.


작년에는 그래도

에너지 넘치고 호기심 많은 아내 덕분에

집에서 왕복  시간 걸리는 남산 산책도 꾸준히 하고

전국에 유명하다는 절과 맛집도 틈틈이 찾아다녔었는데...


올해는 망한 것 같다.

코로나가 무서워 집에 콕 박힌 채

TV와 스마트폰에 넘쳐나는 추천 영화와 트로트 경연을 보며 베짱이처럼 지냈다.

본방은 물론, 재방과 짤방까지 전부 섭렵하다 보니 새해 목표였던 글쓰기는 시작조차 못했다.

게으른 나와 달리, 아침마다 전화영어에 열심인 와이프공부 소리가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누른다.


모두가 잠든 새벽,

익숙한 리모컨 조작으로 단숨에 넷플릭스를 검색한.

<봄날은 간다>를 골랐다.

개봉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첫사랑 같은 설렘을 주는 영화다.


유지태와 이영애의 풋풋했던 시절을 보며, 영화 속 그림 같은 장면들에 한참 빠져들다 보니, 갑자기 촬영지인 강원도 삼척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밀려온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게으른 '나(A)'와 행동파인 또 다른 '본드형(B)' 밀당을 시작한다.


A : 코로나인데 가긴 어딜 가.
B : 휴직 중이니 더 홀가분하게 가면 되잖아?
A : 운전하기 너무 멀어.
B : 무슨 소리, KTX 타고 가면 금방인데...
A : 코스나 일정은?
B : 똑똑한 스마트폰 있잖아. 일단 떠나!
A : 에이, 아직 추운데...
B : 입춘이잖아. 입춘.


본드형, 승!

강원도 입춘 여행은 이렇게 정해졌다.


영화 <봄날은 간다> 초반부는 삼척에서 촬영되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와
강릉 라디오 PD인 은수(이영애)는
대밭 소리를 따기 위해 처음 만나 풍경 소리를 들으며 금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결혼을 원하는 남자와
연애만 원하는 여자 사이에 갈등은 시작되고,
철 지난 파도 소리 속에서 이별이 다가왔음을 예감하는데...


눈 오는 신흥사에서 풍경 소리


철 지난 맹방해변에서 파도 소리




청량리의 추억들


다음날, 동해행 KTX를 타기 위해 청량리역에 왔다.

대학 시절 MT 갈  한두 번  봤던,

기억 속 변두리 지역이 더 이상 아니었.

 

대규모 재개발이 한창이고,

시장통 상인 모습도 무척 활기차 보인다. 

한편에선 여기저기 빌딩들이 쭉쭉 올라가고 있는데,

다른 한편 수산시장의 역한 비린내가 너무 대조적이다.


십여 년 전  본 상하이 개발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당시 부흥하는 중국의 용처럼

상전벽해하는 이곳 청량리도 움츠렸던 겨울이 가고 봄기운이 다시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상전벽해 중인 청량리역


출발하고 두 시간쯤 지나 바다가 보인다.

정동진역에 정차하는 동안, 재작년 해돋이 여행이 떠올랐.

그때도 무작정 떠난 이었는데,

한마디로 개고생이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반려견까지 태워 새벽에 5시간 넘게 운전을 했다. 일출이 다가올수록 꽉 막히는 교통. 간신히 노상 주차하고 한참을 걸어 해변에 도착한 거기서 남극의 펭귄 떼처럼 모여든 엄청난 인파에 놀라고, 영화나올 법한 범선 모양 호텔 뒤 붉게 떠오르는 태양에 또 한 번 놀랐다. 딱 거기까지 좋았다.


모여든 사람들과 차들이 빠지는 동안 우리 가족은 생애 가장 춥고, 졸리고, 배고픈 새해를 보내야 했다. 그나마 그때 찍은 해돋이 사진들이 자타공인 나의 인생 작품으로 남아 위안이 되었다.


2년 만에 찾은 정동진역

해역에 내리니 날이 어둑하다.

맵을 찍어보니 시내 숙소까지 도보로 50분 거리다.

'까짓것 걸어가지 뭐'. 낯선 곳을 혼자 간다는 것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그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여유롭게 30분쯤 걷는 좀 이상하다.

분명 두 번째 주유소가 나와야 하는데 안 보인다. 주변은 이미 깜깜해져 차 한 대 지나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맵을 찍어보니 젠장... 최단경로를 벗어나 한참 멀리 돌아가는 중이다.


걸음이 빨라진다. 한적한 시골길, 드문드문 나타나는 빈집의 개들만 이방인을 경계하며 짖는다. 그래도 귀신은 아니라서 반갑다. '그러게, 역 앞에 널린 택시는 왜 안 타고... 쯧쯧' 어디선가 본드형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 저 멀리 시내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맵에서 본 초등학교. 살았다!


반가운 초등학교 이정표




여행의 이유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을 숙소로 정한 이유는 순전히 '피카소'란 이름 때문이었다. 여행 앱을 검색하다, 뭔가 모호하지만 깊은 영감을 줄 것 같은 천재 화가 이름에 끌려 예약까지 했다. 미술을 전공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운명라고나 할까.


방문록 작성 후 키를 받으니, 로비 에 걸린 셀럽들의 사인이 눈에 띈다.  <올드보이> 영화배우 '최민식' 다녀간 모양이네. 느낌이 좋다.


피카소 호텔의 사인들

에 들어서니 노트북, 스타일러, 양말까지 깔끔하게 비치된 Cozy 한 공간이 반긴다.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를 보니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中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프다.

아직 7시도 안되었는데 몇 군데 편의점과 식당의 불빛만이 보일 뿐, 시내인데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맛집 찾는 비결인 '손님 많은 '은 포기하고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맥도널드'를 찾았다. 여기까지 와서 인스턴트라니... 그런데 여전히 맛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술과 안주를 샀다. 맥주나 소주를 살까 하다 거금을 주고 '잭 다니엘스' 폼나게 골랐다. 저녁은 비록 햄버거로 때웠지만 좋은 술로 기분 좀 내야겠다.


호텔방으로 들어와 노트북부터 다.

이번 여행에선 계속 미뤄온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굳게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다시 본드형이 나타나 묻는다.


A : 왜 글을 쓰려고 해?
B : 지난 인생의 의미도 찾고, 일상을 재밌게 보내며 작가라는 직업에 한번 도전해 볼까 해
A : 넌 어떤 사람이니?
B : 갱년기 가장에 대기업 부장,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영화 마니아. 또...


여기까지 써놓고, 위스키 몇 잔을 들이켠다.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되면
이 호텔 로비에 내 사인도 걸릴까?


멀리 떠나온 동해의 봄밤,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 또 다른 나를 마주할 용기를 준다.


술이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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