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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r 23. 2021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알다

강원도 입춘 여행기 2

청춘을 돌려다오


삼척행 시외버스를 .

노약자석 아닌 자리를 찾아 머뭇거리는데, 기사 아저씨가 "빨리 앉아야 출발하죠!"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다. '내가 약자로 보이나?' 했지만 참고 있는데 '본드형'이 머릿속에서 한마디 거든다. '버스도 텅 비었는데 그냥 아무 데나 앉으면 . 란 놈, 쯧쯧...'


인정한다.

나는 차 한 대 없는 교차로도 꼭 파란불에 건너는

쓸데없이 소심한 A형 게자리다.

세금이나 과태료도 반드시 납부기한을 지킨다. 어쩌다 연체라도 되면 죄짓는 기분까지 든다. 젊은 시절엔 그게 성실한 시민의 의무라 믿었는데, 지금은 유연성 떨어지는 호구처럼 느껴져 . 갱년기라 그런가?   


중앙시장 앞에 내렸다.

시장 2층에 '청년몰'이란 간판이 보여 올라갔더니, 매장 이름에 유독 '청춘'이란 문구가 많다.

뷰티 <청춘을 돌려다오> '얼굴/복부 특수 관리'란 알 수 없는 상품을 할인 이벤트 중이다. 젊은이들이 타깃일 텐데... 탱탱한 그 나이에 이런데 돈을 쓸까 싶다.

하긴, 언젠가 아내가 아들에게 하던 말이 .

"너, 지금부터 피부관리 안 하면 아빠처럼 된다"


중앙시장 2층 청년몰 가게들


신흥사 가기 , 이른 점심을 먹으러

버스터미널 옆 <으뜸 식당>에 들어와 육개장을 주문했다.

음식을 내 온 식당 아주머니가 TV에 정신이 팔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요즘 대세인 트로트 프로그램인가 보다.


사람들은 왜 트로트를 좋아할까?

아마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가사와 멜로디 때문이리라.

"나이야 가라~나이야 가라~나이가 대수냐~" 어느새 나도 발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오늘을 최고처럼 살자'는 식당 주인의 긍정적 마인드처럼 지난한 코로나 시기를 버티는 삶의 지혜를 트로트에서 배우는 것 같다.

   

육개장이 최고인 터미널 식당



아버지란 이름으로

드디어 신흥사 입구다.

 녹지 않은 얼음 사이로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숲 소리와 함께 고즈넉하다.


절은 예상보다 작고 조용했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동자승을 기대했는데 웬걸, 내 또래 스님 한분과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영화 속 '상우(유지태)'처럼 어색한 합장을 하고 인사를 나눴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대웅전 처마 밑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딸그~ 딸그랑~" 어제 봤던 동해바다처럼 짙푸른 하늘 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춤을 춘다.

영화 눈 오는 밤에 풍경 소리도 좋았지만, 눈 부시게 푸르른 날 보이는 풍경도 너무나 그림 같다. '역시 오길 잘했어'    


'허진호' 감독이 남긴 글이 대웅전 앞 '설선당' 벽 어딘가 붙어있다고 했는데 못 찾겠다. 거장의 흔적을 사진 한방 남기지 못해 아쉽다.


신흥사 대웅전에 매달린 풍경


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밭집을 찾았다.

영화가 개봉된 20년 전, 이미 일흔이 넘으셨던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실까? 봉밥을 차려주시던 그 넉넉한 인심이 궁금했지만, 굳이 생사를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행 후기에서는 <영화 촬영지>란 표지가 있다고 했는데 못 찾겠다. 아마도 코로나 시기에 관광객이 몰리는 걸 막기 위한 지자체의 고육책이 아닐까? 나름 합리적인 추리라고 셀프 칭찬을 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대밭 옆 할머니집이 멀리 보인다


신흥사로부터 걸어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맹방해변으로 떠났다.


문의재 근처 마을을 지날 때 플래카드 하나가 보였다.

 "축, ㅇㅇㅇ 손자 ㅇㅇㅇ 서울대학교 합격".

말로만 듣던 '개천에 난 용'인가 보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의 기쁨과 뿌듯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다리가 불편한 당신을

할아버지께서 지게에 업어 몇십 리를 등하교시켰다는 전설 같은 얘기들을 해주시면서,

대학에 떨어진 아들에게 술 한잔 사주시던 분.

래카드까진 아니겠지만,

재수 끝에 '명문대' 들어간 아들 자랑을 꽤 하셨겠지...


갑작스러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정신없이 떠나시는 바람에 그땐 몰랐는데,

당신 손자, 재작년 대학 가는 거 보셨으면 참 좋았을 걸...

시간이 지날수록 빈자리가 사무친다.

아버지가 서야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     


문의재 근처 마을 플래카드


한 시간 넘게 걸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배에 '신호'가 온다. 조금씩 강해지더니 점점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어디 간이 화장실이라도 어야 하는데,..  젠장, 화장지라도 챙길걸...' 나는 괄약에 힘을 주며 경보를 시작했다.


'도저히 못 참겠어. 윽, 제발...' 순간 눈앞에 구세주처럼 근덕면 '주민센터'가 보인다. 출입기록을 작성해달란 안내원에 간절한 눈빛을 맞추고 화장실부터 물었다. 아마 1분만 늦었어도 끔찍한 대폭발(?)이 일어났으리라. "시민 중심! 행복 삼척" 맞는 말이다.


구세주였던 근덕면 행복센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배를 비우니 발걸음이 가볍다.

저 멀리 맹방해변이 보이는데, 가까이 갈수록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끝없이 펼쳐진 시퍼런 바다, 세찬 바람에 거친 파도가 마치 소떼처럼 몰려온다. 장관이다.

사진 찍어야 하는데 '젠장... 배터리가 없네'.  


'그렇지!'. 가방에서 펜과 다이어리를 꺼낸다.

반쯤 남은 위스키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익숙한 시 한 구절도 떠올라 옆에 적어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끊임없이 술이 들어가는데 파도가 자꾸만 시비를 걸어온다. ', 두렵지 않다고, 오라고...'


며칠 전 영화 <병 속에 담긴 편지>가 떠오른다. '그래 이거야'. 위스키 병에 다이어리를 찢어 집어넣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힘껏 던진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병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해변으로 밀려온다. 다시 던진다. 또 밀려온다.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파도와의 싸움에서 결국 난 졌다.


술취해 그린 맹방해변 그림

취기가 오른다.

몸이 비틀거리고 혀가 꼬여온다.

정신도 혼미해진다.

지나가는 택시를 간신히 잡아 터미널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모텔로 들어가 영혼까지 끌어 모아 모든 걸 토해냈다.


신흥사도, 맹방해변도, 분명 영화 속 그 장소였는데...

현실은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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