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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의 즐거움에 빠지다

의자 하나로

by 본드형

차경(景).

자연의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건축과 관련된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처음 들은 말인데
유난히 많은 창과 문을 통해 다양하게 변하는 바깥 풍경을 액자처럼 담는 한옥의 미학을 설명할 때 쓰인다.

소유해서 벽에 거는 그림과 달리, 자연을 그대로 존재하게 한 뒤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난 요즘 차경의 즐거움에 빠졌다.

그것도 의자 하나로...




시작은 지난봄, 섬진강 여행 때였다.

광양 매화마을 근처에 얻은 숙소에 캠핑용 접이식 의자 2개가 있었다.


평소 갖고 싶어 했던 디렉터스 체어(Director's Chair : 영화감독이 야외 촬영 시 앉아 레디고를 외치는 의자)와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뭔가 짝퉁같이 느껴져 시큰둥하고 있는데, 호기심 많은 아내가 들고나가더니 마당에 뚝딱뚝딱 설치하고 앉았다.


"오 편해! 한번 앉아봐"


정말 생각보다 튼튼하고 편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의자에 앉아 멀리 흐르는 섬진강과 여기저기 듬성듬성 피어나고 있는 매화들의 풍경을 바라보는 맛이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오랫동안 불멍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거의 잊고 지냈는데... 아내는 아니었다.


"이 의자 어때? 정말 편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회사에서 한창 미팅 중인데 아내가 톡을 보내왔다. 일산 근처 캠핑용품 매장에서 골랐다는 의자 사진과 함께 '디자인도 세련됐고 등받이 조절도 가능해... 살까?' 하며 흥분해 있는 그녀에게 '좋아^^'하고 서둘러 답을 보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톡이 왔다.


"여기 호수공원인데, 천국이야!"


역시나... 우리 마눌님이 그냥 가실 분이 아니지. 바로 실행에 옮기는 그 실행력에 감탄하며 톡을 읽었다.

아까 매장에서 전시된 상품으로만 보였던 것과 달리, 푸르른 자연 풍경 속에 놓인 의자와 그 의자에 앉아 올려다본 나무 그늘의 사진이 너무나 편하고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때부터였다.


우린 매주 그 의자를 들고 '체크닉'을 떠난다.
(참고로 체크닉은 체어+피크닉이란 의미로 아내와 만든 신조어다)

햇볕을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산이나 강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차 트렁크에 싣고 간 의자 2개를 꺼내 설치하고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고

그러다 졸리면 잠을 자거나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그냥 의자 없이 가서 앉아있다 올 때랑 뭐가 다르냐고 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전월세를 살다가
내 집을 마련한 기분이라고...


한옥을 통해 차경의 지혜를 물려준 조상님과
의자를 통해 그것을 경험하게 해 준 마눌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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