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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r 23. 2021

첫사랑은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다

강원도 입춘 여행기 3

터닝 포인트


숙취로 머리가 띵하다.


게으르고 익숙한 나(A)와

여전히 낯설지만 행동파인 또 다른 , 본드형(B)

아침부터 침대 속에서 협상 중이다.


A : 여행이고 뭐고 다 귀찮아.
      집 떠나면 개고생 맞지?
      오늘 돌아가는 거다.
B : 또 시작이다.
      겨우 이틀 지났어. 하루만 더 있자구.
      대신, 오전에는 푹 쉬는 걸로... 오케이?


본드형의 꼬임에 또 넘어간 나는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책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달려도 될까?'란 목차가 훅~ 땡긴다.

우리는 종종
나에게 어떤 선택권이 있는지 모르고 삶을 살아간다.

하나는 더 넓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비싼 외식을
할 수 있는 돈이다.

또 하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이다.

어떤 이들에게 터닝 포인트란
돈에서 시간의 자유로 이동하는 삶이다.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中


그래, 지금은 분명 내게 터닝포인트다.


두 번의 휴직으로 월급은 줄었지만, 

아무 때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겼.

사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이미 2년 전에 시작되었다.


부장 5년 차였던 나는

연말 인사에서 임원 승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력 입사 후 CEO 직속 기획팀장으로 전격 발탁되며 승승장구했던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 . 수. 가...'

나 보다 6살이나 어린, 부장 3년 차 후배가

 윗자리 기획담당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설상가상, 바로 이어진 부서장 인사에서

나는 팀장 직책에서도 밀려나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


처음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누군데...

명문대 나와 외국계 컨설팅회사를 거쳐 유학까지 다녀온 소위 '핵심인력' 아닌가?


지금 생각하

스펙보단 성과를 내야 하는 임원 승진 기준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데

당시 엘리트 의식으로만 꽉 차 있던 나는 내 것을 뺏겼다는 억울함에 병까지 났다.


갱년기와 함께 찾아온 우울증으로

회사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피하고, 집에선 잠을 못 자는 괴로운 날들이 꽤 오래 지속됐다.

태어나 처음으로 상담이란 것도 받았다.


다행히 3 아들이 원하던 대학에 붙어

밀린 숙제라도 하듯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가자"는 와이프의 위로가 큰 힘이 됐다.

 

그렇게 1년을 넘기니, 이번엔 코로나가 왔다.

해외 비행길이 막히고 사회적 격리가 시작됐다. 전년까지 최대 성과를 냈던 회사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인건비 절감을 위한 휴직이 생기고, 재택근무가 일상화되었다. 일에서 멀어져 갑자기 늘어난 자유시간에 나는 미친 듯 영화와 TV만 봤다.




바람이 분다

강원도 입춘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대관령이다.


횡계 터미널내리니 칼바람이 분다.

봄이 느껴졌던 동해나 삼척과 달리, 여긴 아직 한겨울이다.

동계올림픽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거리를 둘러보다가 딱 봐도 '포스'가 느껴지는 카페 <7 hundred>를 발견했다.


4층 건물 전체가 커피 볶는 냄새로 가득하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창가 쪽자리 잡고, 아침에 보던 책을 마저 읽다 보니 슬슬 졸음이 온다.

햇볕 드는 카페 창가에서


갑자기 내가 있는 3층과 오픈되어 연결된 아래층에서

아재들의 대화가 들린다.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뻔한 얘기 같은, 목소리 큰 어르신 이야기가 정말 끝이 없다.


재즈가 흐르던 나른한 공간이 순간 시끄러워진다.

옆자리 아주머니들도 더 이상 못 참고, 계속되는 층간소음에 투덜대기 시작한다.

"남자들은 나이 들면 말만 많아질까?"


뜨끔했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선배로서 경험이 많아서... 가장으로 걱정이 돼서...' 명분은 좋지만 결국 대부분 쓸데없는 말이다.


하지만 이유도 알 거 같다.

세월에 쪼그라든 자존감에 불안하고 두려워서 그러는 거다. 외로워서 그러는 거다.

귀 기울여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 필요해서다.


최백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이유가

잃어버린 '낭만' 때문이라고...


오늘 묵을 펜션에서 픽업을 왔다.

대관령 눈에 반해 부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주인이다. 목장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지금 날씨엔 절대 무리란다.

아쉬운 대로 펜션  언덕을

마치 에베레스트 등반하듯 힘겹게 올랐다. 


저 멀리 힘차게 도는 풍력 발전기 너머가 목장이란다.

소들과의 조우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마트에서 사 온 소고기나 먹어야겠다.


바람 부는 대관령




홀로 된다는 것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스테이크를 구워 캔맥주 하나를 비우니 살짝 졸리다.

아직 초저녁이지만 일단 침대에 파고든다.


산 위라서 그런가

바람 소리만 '웅웅~' 들리고 가끔씩 창이 심하게 흔들린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

외롭다기보단 오히려 편안하다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 철저히 혼자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도

상사의 보고에 목숨 거는 부장도 아닌

이 순간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유튜브로 <봄날은 간다> OST를 찾아 틀었다.

김윤아가 부른 노래좋지만,

난 백설희가 부르고 여러 번 리메이크된 옛 노래가 더 .

특히 시 같은 가사는 예술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이 옛 노래를 듣다 보면

영화 속 상우 할머니가 마지막 집을 나서는 장면이 떠오른다.

청춘의 봄처럼 설렘은 없지만

노년의 봄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묵직함이 있다.


"한번 떠난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게 아니란다" 

실연당한 손자에게 해주는 할머니 말씀은 무슨 뜻이었을까?


남자들이 못 잊는 첫사랑의 대상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다.

다시 돌아온 여자를 잡아본 들 어쩌겠는가.

내가 이미 변한 것을... 


버스도 여자도 지나간 과거는 아쉽지만 떠나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올 미래를 기다리며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상우미소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봄날은 간다> 마지막 장면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니 이미 봄이 와 있다.

사람들은 아직 외투를 껴입었는데, 더워서 웃옷을 벗는다.

강원도의 거센 겨울바람을 견디고 나니

몸도 마음도 제법 단단해졌나 보다.


본드형, 봄날이 가네

술 한잔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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