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초에 홀린 중년남
반려(伴侶)
'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를 뜻하는 이 말이
동물과 식물에도 붙는 시대가 되었다.
15년을 가족처럼 살았던 토이푸들 짱이가
올해 초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
허전해진 그 자리를 채워주는 '반려식물'들이 있다.
우아한 자태의 여인초,
번식력이 왕성한 소뿔스투키,
바람을 좋아하는 아스파라거스 나누스...
이사 때마다 하나 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베란다 공간을 몽땅 차지해 버렸다.
식물이라면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으로만 구별할 줄 알았던 내가
이젠 제법 각각의 이름까지 외우게 된 건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한번 들으면 까먹고, 두 번 들어도 잊어 먹고
또 물어보는 남편이 답답했는지
설거지처럼 이것도 분담해야 할 '살림'이라며
물 주기 당번을 시켰기 때문이다.
"날씨나 종류에 따라 다른데,
그냥 화분의 흙 만져보고 말랐을 때 충분히 주면 돼"
별거 아닌 것처럼 넘겨받긴 했지만
막상 살아있는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수유하는 엄마처럼 물 주는 걸 잊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름까지 외워졌단 얘기.
(역시 아내는 나를 잘 안다)
가장 멋진 이름은 여인초다.
초록잎들을 마치 부채처럼 우아하게 펼친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女人)'을 말하는가 싶었는데
나그네를 뜻하는 '여인(旅人)'이란다.
크고 넓은 그 잎으로
나그네가 물을 마시거나 비를 가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달리 상상해 본다.
새 가지가 늦게 올라오면
축 처지고 잎이 갈라진 옛 가지들을 쳐내야
무럭무럭 자라나 넓은 새 잎을 펼치는 그 삶처럼
때가 되면 모든 걸 내려놓고
나그네처럼 훌쩍 떠나야 하는 우리네 인생을
담은 작명일 거라고.
그렇다면,
반려식물들이 모인 우리 집 베란다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 온 나그네들이 쉬고 있는
작은 여인숙이 될 거고.
거기선 아마도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 거라고.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서울 탱고> 中
바람에 흔들리는 여인초 잎들이
탱고 리듬에 맞춰 춤추는
여인들 같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데
주렁주렁 달린 초록 빛깔 대추열매들이
가을비에 젖어 더 탐스럽게 보인다.
사람이 아닌,
자연이 물 주어 키운 식물이라 그런가.
그중 하나가 벌써 빨갛게 익어 멋지게 주름이 졌다.
오래 바라보며 다짐했다.
저 대추처럼 나도
잘 익은 중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