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휴지

단편소설

by 유월

내일이 두려워, 아니 오늘 역시 두렵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더 두려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을 살기에 버거운 내가 내일을 산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니까. 난 사실 오늘을 살기가 두려워 어제에 머무르는 인간이니까. 모든 사람들이 내일로 향할 때, 난 그들이 이룬 어제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찌나 절망스러운지 그들은 나를 감히 예측조차 못하겠지. 하긴 나조차 나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을 내가 어찌 그들을 설득시키랴. 나는 남을 이해시키기란 포기했다. 남에는 나 역시 포함이었다. 나는 나조차 모르니까. 내 감정 한 줄, 마음 한 소절 내뱉지도 못하는 데 나는 과연 내가 맞는가. 누군가 나를 대신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라는 호칭은 맞는가. 나라는 호칭조차 낯선 지금 나는, 나를 오로지 바라볼 수는 있는 것인가.

휴지를 구겨 잡아 그저 뭉치고 풀어내기를. 남들은 좋은 날이 온다고 백날 천날 떠들어대지만. '보아라 내 휴지는 나아질 기미 없이 그저 구겨지고만 있지 않느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형편없이 망가진 휴지는 나아지지 못한다.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처음처럼 그리 빳빳하진 못하겠지. 아 그래 달라진다면 조금은 부드러워졌겠지. 허나 그러면 뭐 하나. 결국 구겨지고 펴진 휴지일 뿐. 구김 없는 사람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이런 사실 따위 내일을 살아가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 잘 안다. 허나 나는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으니까.

그래 어느 날에는 좋은 날이 오겠지. 그럼에도 가끔 비도 오겠지.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겠지라는 허울 좋은 말들을 난 안다. 하지만 나는 구겨진 휴지잖아. 다시금 비가 온다면 나는 형체도 없이 풀어지고 말 터인데. 그럼 나는 남아있는 것이 맞을까. 그저 남들에게 동화되는 삶인 것은 아닐까.


"아 또 비가 내린다."

것 봐 비 오는 날엔 더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 거야. 주머니 속 꼬깃꼬깃 접어둔 눈물 젖은 휴지 따위 펴질 리가 없으니까.

"더럽게도 많이 내려."

"..."

"괜찮은가."

"...: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빗줄기에 섞어 내뱉는다. 장대 같은 비니까 이런 하찮은, 쓸모도 없는 작은 말을 들리지 않을 텐데.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서 더 한심해지는 비 내리는 날.

"전혀 괜찮지 않아."

"..."

"비 같은 건, 그만 오면 좋겠는데."

휴지는 가볍기 그지없는데 주머니 속 숨겨둔 구겨진 휴지는 뭐가 그리 무겁다고 부여잡은 손이 바르르 떨리는지. 훌쩍이는 소리 따위 빗소리에 묻으면 그만인데 나는 점점 목이 메어서 소리가 커지나 보다. 구겨진 휴지 같은 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닌데.

그저 휴지를 손에 올려 비를 맞는다. 따갑다. 장대같이 우스스 쏟아져내리는 비는 구겨진 휴지쯤이야 금세 풀어버린다. 나는 그 모습에 그저 손을 감았다가 폈다가를 겨우 반복하고. 우산마저 접는다.

"비 같은 거, 맞고 싶지 않았어. 형편없이 오늘을 보내기 싫었어."

나는 그저 구겨졌겠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어제조차 형편없었지. 그래 난 구겨진 휴지다. 다시 펴질 수조차 없는. 어떤 가능성조차 사라진 그저 구겨진. 그저 부드러워진, 다시 원래대로 변할 수조차. 그런 가능성조차 될 수 없는 축축한 휴지. 잘 구겨져 흔적만 잔뜩 남은 그저 그런 휴지. 나는 비 오는 날이 두려워. 그래 역시... 비 같은 건 오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나는 그저 풀리지 못할, 그저 작은 구겨진 휴지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