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의 모순
나는 그저 한 겨울에 반바지만 입고 나온 사람마냥 덜덜 떠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멍청하게 날씨조차 알지 못하고 그런 옷차림을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게 적어도 오늘의 날씨를 그리 전할 거라면 나는 목도리라도. 아니 적어도 모자라도. 하다못해 신발이라도 신고 나왔을 터인데. 그래서 발이라도 다치지 않아 어디든 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제 아무 곳도 갈 수 없는 머저리가 되었다.
선고. 선고라는 말이 잔인하다고 느낀 건 그해 봄. 선언이라는 말도 선서라는 말도 그리 멋지게 들렸으니 선고라는 말도 어쩌면 멋지다 이내 생각한 말이었는데. 너의 선고는 꽤나 잔인했기에. 나는 그해 봄 선고의 뜻을 다시금 적어냈다.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한 나였기에. 내가 선고의 뜻을 잘 모르던 것은 아닐까 헛웃음을 지어내기도 했다. 너는 나와의 이별을 뭐 그리 널리 알리고 싶었는지. 왜 이리저리 소문을 내지 않고는 안 되었는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너는 일방적 소통으로 너의 이야기를 전할 뿐. 나의 이야기는 한 번을 깊게 들어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너의 이별 선언에 고작 멍청하게 울기밖에 더 했을까.)
계절이 바뀌면 너와 하기로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여름에는 빙수를 먹으러 가자고, 가을에는 단풍을 보자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자고. 다시금 돌아올 봄에는 꽃반지를 손에 끼워주기로 하였던가. 그쯤 되면 내가 돈이 없겠느냐며 반지를 맞추자 하였지만. 너는 그저 웃으며 손에 매이면 사랑인 거지. 사랑이 매이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다며 웃은 것이 기억난다. 결국 실체 없던 반지를 매이기도 전에. 그 꽃은 그저 풀밭에 남았겠지만. 나는 그저 꽃을 보면 때론 답답한 마음에 저 꽃을 꺾고 싶단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꽃은 다시 핀다던 네가, 내년 봄을 맞이한다면 다른 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또 속삭일까 생각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 '저 꽃은 올해까지 피고 진단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추한 말을 전하기도 하였으니. 나는 정말 꼴이 우스웠다.
이곳저곳 붉게 묽든 단풍을 보면 발그레하던 네 뺨이 떠오른다. 겨울을 돌이켜내면 수수하게 웃어내던 네가 자꾸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계절마다 할 일들이 넘친다며. 나와 보내는 첫 번째 계절이라며 나를 꾸짖던 네가 떠오른다. 너의 계절은 또 다른 이와 흘러가고 있는지. 추하게도 자꾸, 결국은 네 생각이 난다...
월아, 계절이 온단다. 네가 기다리던 그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다시 돌아온다더라. 나는 아직 이 계절이겠지만.
반드시 돌아온다더라. 내가 기다리는 계절은 그 무엇도 홀로 보낼 수 없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