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회피
도망치고 싶었어, 나는 항상.
그녀는 벚꽃 잎을 지르밟고 달렸다. 도망쳐. 이 두려운 마음을 버려야 해. 스스로 건넨 어색한 위로가 우스웠지만 걸음을 멈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봄이 두려운 건, 그녀에게 새로운 감정들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기대감, 설렘 같은 기분이 그녀를 잠식하지 않길 바랐다. 이렇게 들뜨고 나면 무너지는 건 순간이잖아.
올해는 벚꽃을 보고 싶지 않아. 금세 져버릴 벚꽃 잎,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을 종용받고 싶지 않았다. 들뜨는 마음 따위 사치라고 생각했다. 분홍빛 물든 세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봄의 설레는 정서가 싫었다. 누구든 양볼에 분홍 벚꽃 잎 피우는 게 왜인지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사랑을 담은 사람들은 아름다워서, 이 계절감은 늘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봄이 두려운 건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 그녀는 매번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사랑하기 싫은 거야? 어쩌면 사랑이 두려운 건 아니고?
그녀라고 꽃 피운 순간이 없었을 리가 없지만. 그녀에게 꽃은 감정의 증폭이었다. 감정이 끝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 그녀는 짓밟힐 감정은, 소중하지 못하다 떠올렸지만, 이내 그것도 피워낸 무엇임을 알고 괴로워했다. 봄은 잔인해. 혼자 독백 속 그냥 창가를 바라보는 것에 그쳤다.
창문 속에 연인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꽃 피워낸 저 연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때 꽃 피우지 못한 내 마음은 시들어갔는지. 사랑한다 감히 말하지 못한 내 꽃은 어디에 피어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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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잎이 날렸던지, 그저 꽃내음이 퍼진 것인지. 봄의 향기가 무서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심장 뛰게 두근거릴 일은 없었을 텐데. 가는 발걸음마다 내 눈이 쫓는 걸 보면 내 봄이 저기라고 떠올리니까. 꽃 피는 봄, 이내 터지는 감정 속. 사랑을 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그게 가장 그를 사랑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봄은 그녀에게 그렇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붙잡은 두 손, 별 의미 없이 들어온 그 체향.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 설명할 수 있을지. 비슷한 보폭, 비슷한 눈높이. 찰랑이는 머리칼, 간혹 사랑이 아니다 의심할까 두려웠지만, 빠르게 피어내는 꽃은 그리 말했다. 사랑이다, 봄에 완연히 자리 잡은 사랑이다.
봄의 마음을 알 길은 없었다. 감정이 공유된다는 낭설을 믿지 않았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이라고 떠올렸다. 사랑을 피워내는 일은 없었다. 바보같이 벚꽃 밑에서 고백하진 않을 거라고. 봄에게 꽃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에는, 그래 추운 겨울이 온다면 다 시들어버릴 꽃. 봄에 꽃이 피어나는 건 너무 지겨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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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마 고백하지 못했지. 벚꽃 잎이 흩날릴 때도, 살랑이는 바람결에 심장 두근거릴 때도 대답하지 못했지. 그녀는 스스로의 사랑이 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봄에 어울리지 않아,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너를 좋아하고 싶지 않아.
벚꽃 잎이 하늘에게 가벼이 내려앉을 때 그런 이야기를 내뱉었다. 설레지 말아라. 져버릴 이 꽃아. 어서 짓밟히거라. 봄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피어낸 후 결국 떨어져 짓밟힐 더러운 마음을 갖고 싶지 않다고.
“도망치고 싶어, 널 아끼는 어떤 한 잎의 마음마저.”
마음속 꽃을 지르밟았다. 봄은 나의 계절이 아니야. 아름다운 이들의 계절. 더럽혀질 꽃을 피워내지 않으리란 그녀의 다짐 속, 창문 속 벚꽃은 그저 내린다. 머문다. 잠식되지 않게 고요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