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과 한여름의 사이에서
울창한 잎사귀를 보고도, 겨울을 두려워하는 것은 너뿐일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날보다도 더 끈적한 시선이 내게 붙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눈을 가졌을까 생각했다. 뛰어난 미색을 가진 것은 아닌 것도 같은데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시선 끝에 열이 오른다. 저 뜨거운 열기는 여름이라서는 아닐 텐데. 한 번 떠올리면 의식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러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에게 의문이 들었지만, 수줍음이 많구나. 그 애는 참 봄 같은 사람이구나 느꼈다. 초봄, 겨울이 지나갔는지 몰라 망설이는 꽃잎처럼. 좀 더 날 바라봤다면 나도 그 두 눈 마주쳤을 텐데. 감정이 공유된다던데, 그 애 마음이 내게 닿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열감이 나를 잠식하고 있음을 느꼈다. 뜨겁다, 마음 한 구석 타오르는 것이. 이것이 사랑의 온기라면 여름이 오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에게 상처받은 것은 별 이유가 아니었다. 자꾸 나를 바라보다가도 후다닥 뛰쳐나가는 것이 답답했다. 나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 도망치지. 그렇게 도망치면 계절을 보낼 수 없을 텐데. 그 애는 혼자만의 이기적인 계절을 갖고 싶은지. 나와의 찰나만을 간직하고 싶은지. 여름철 뜨거운 열기가 네겐 없는지 어쩌면 나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지. 네 열기가 내게 다 온 것은 아닌지.
시선이 마주친 어느 날, 그 아이를 무작정 따랐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여름날이 무더워서 싫은지. 가을날이 오면 날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지 않을 거면서. 어쩌먼 다 식어버릴 마음일지도 모르는데. 여름을 두려워하는 건 너뿐일 텐데. 그럴 거면 나를 좋아해 주지 말지. 그 눈은 분명 사랑이었잖아
무작정 그녀를 따라잡는다. 탁, 시선이 맞닿은. 계절의 순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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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좋아해?"
대범하게 던진 봄에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답을 보였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눈빛 속에 방울을 담았다.
"나는, 그게..."
"또 도망치려고? 뭐가 두려워. 너무 뜨거워서? 날 좋아할 자신이 없어서?"
툭, 툭 떨어지는 방울, 방울. 여름의 소나기. 그의 미음도 무거워 쏟아지고. 그의 시선도 바닥을 향한다. 울지 말지, 닦아줄 수 없는데. 너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네가 알고 있을지 몰랐어. 그냥 스쳐가는 감정이라고, 네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운다, 방울이 목을 타고선 결국 흘러내린다.
"봄은 지났잖아. 꽃이 지면, 나는... 나는..."
봄이라니, 잔인해. 네가 내게는 초봄이었잖아. 그가 이렇게 떠올리는 순간. 그녀가 털썩 주저앉고 만다. 미안해, 다시는... 다시는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그가 해줄 말이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조차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항상 그녀는 혼자 창밖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울창한 잎사귀를 봤다. 왜 저렇게 슬퍼하는 거지. 계절은 또 돌아올 텐데. 무엇이 그렇게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을까. 답답해, 너무나도 답답해.
"안 졌어. 지금은 초여름이잖아. 그늘진 어딘가엔 벚꽃이 피었어."
"... 뭐라고?"
울먹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한 여름인 줄 알았나 보다."
"..."
"아직 초여름인데. 봐, 벚꽃이다."
그늘진 어딘가 미쳐지지 못한 벚꽃. 부끄러움이 많은지 숨어버린 작은 벚꽃 잎.
"여름을 보내자. 뜨거운 여름을. 식어버릴 그저 그런 저녁의 여름이 아니라."
말의 힘을 느끼는 그였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타올라 목이 아팠나. 이렇게 갈증이 났나. 표정이 그려지지 않아, 그녀의 눈물이 멈추길 바랐는데.
"감정의 정점에서 피어오르자. 꽃을 시들게 할 필요가 없잖아."
매미 소리, 가끔 내리는 소나기 뒤엔 쏟아지는 장마. 다 져버릴 벚꽃. 그러고 피어날 새로운 꽃. 여름의 꽃, 울창한 잎사귀. 뜨거운 여름. 달아오를 그 계절이 오니까. 꽃의 시듦은 아직이라고. 아직 뜨겁다고.
손을 잡는다, 뜨거워. 한 여름이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