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직면할 사계

차게 식은 커피잔

by 유월

뜨거운 커피는 금세 식어버리곤 한다. 차게 식는 건 커피잔의 온도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아니라면 조금은 천천히 식었겠지만, 눈발 내리는 겨울이기에. 결국은 차게 식어버릴 무언가.

다시 만난 이유는, 그가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매번 도망치는 내게 닿기 위한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울 것 같은 눈으로 겨울을 맞섰다. 가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우리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는 얇디얇은 코트로 나를 맞이했다. 그에겐 시간이 조금도 지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는 건넬 말이 없어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씁쓸하게 이야기를 나누자 전했다.

카페에 가서 그는 따뜻한 라떼를 시킨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가 음료를 받고 늘 그렇듯 그는 내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두 번 넣어주고 휘, 휘저어둔다. 마지막날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떠올렸지만. 달달한 시럽에 괜히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우린 아무 말 없이 10분을 보낸다. 아메리카노의 크레마가 깨지고, 라떼잔의 하트는 거품기 없이 매끈하게 남는다.

그가 라떼 한 모금을 머금고, 내게 한 마디 올린다. 떨리는 음성, 나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가늘게 떨린다.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어?"

"네 말대로 뜨거울 자신이 없어서."

상처를 줬을까, 얇디얇은 옷 입은 네게 한기를 느끼게 하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 춥지. 넌 항상 도망치니까."

아무리 식었대도 뜨거울 라떼를 그가 벌컥 마신다. 나도 목이 타 한 입 마실까 떠올려 잡지만 이미 차가워진 잔은 온기를 주지 않는다. 차가워진 커피와, 공허한 공기,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입김 후 내뱉는 계절감.
고민 끝에 마신 커피는 쓰다, 시럽 따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는 내게 어떤 답을 원하니. 정적에 묻는다. 어쩌면 그는 대화하러 올 자신이 없었겠다 싶었다. 나는 이렇게 만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거든. 난 그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게 끝이 나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시간을 끌면 눈이 더 많이 내릴 텐데. 그가 돌아가기 힘들지도 몰라, 그 얇은 코트로 이 겨울바람을 어찌 이겨낼까.
차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괜히 후 분다. 그가 많이 뜨겁냐 걱정스레 묻지만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뭘 못 해?"

"그냥, 다 자신이 없어... 날이 많이 추운데."

괜히 잔을 가볍게 돌린다. 돌릴 말이 없어, 숨이 막히니까. 너는 눈이 벌게진다. 너는 다시금 그 뜨거운 라떼잔을 들고 마신다.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네가 왜 못 하는데? 네가 그렇게 못한다고 할 때마다 나는...!"

한기에 잡은 커피잔, 다 식어빠진 아메리카노. 나도 괜히 욱해서 던진 말. 뭐가 억울했기에 그에게 상처 줬는지 모르겠어서. 왜 네가 더 상처받는 거야? 내가 못난 탓인데도. 너는 왜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거야?

"누가 너한테 못한다고 했어? 너는 다 잘 해낼 수 있어."

"내가 해낼 수 있는 게 뭔데? 난 헤어지자 이 말밖엔 난 못 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야? 응원해 달라는 거야...?"

당황한 내가 손에 쥔 아메리카노를 쏟는다. 놀란 네가 내 손을 닦아온다. 탁, 쳐내고 난 네게 말한다.

"이제 이럴 필요 없어. 나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 너는 내가 버렸어. 네가 날 버린 게 아니고. 내가 널 버렸어."

너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황급히 물티슈를 찾는다. 뜨거우면 어떡해, 화상 입으면 어쩌려고. 울컥 감정이 차오른다. 너는 자존심도 없는지. 커피잔은 뜨겁지도 않은데.

"다 식었어. 이제. 한 모금도 없어."

사실 너를 좋아하는 일이 내게 쉽지 않았다. 좋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연애가 서툴러서 어떻게 사랑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전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미처 전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이야기가 멋대로 단정 짓고 홀로 자리를 벅차고 나온다.

"그러네, 네 커피는 다 식었네. 내 커피는 아직 뜨거운데..."

그 말 끝으로, 그는 날 더 잡지 않는다. 은은한 커피 향, 시럽 때문에 조금 끈적이는 손. 펑펑 내리는 눈. 네가 춥겠다 떠올려 목도리라도 전해줄까 싶다가도 멈추지 못한 발걸음. 난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봄에도, 여름에도 늘 도망치고.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도. 너는 늘 날 앞서갔다. 계절 앞에서 기다리는 건 너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널 앞섰다. 괴롭고 힘든 순간에는 내가 널 앞서는구나. 잘 봐, 나는 네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손이 시려 대충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뜨겁다. 그가 언제 넣어둔지 모르겠는 핫팩. 그는 고작 가을을 보내고 있으면서 왜 내게 건네주었을지. 눈발이 입술에 닿는다, 차갑다. 그 입맞춤은 뜨거웠는데.

난 네 눈빛이 좋았어. 네가 널 좋아한 건 그런 이유였어. 계절이 변해도 변치 않는 그 눈빛이. 변한 건 나야. 네 눈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나.

핫팩을 버리지 못한다. 뜨거운 마음에 울컥 쏟는다.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