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채 함부로 밟히는 낙엽처럼 마음이 처참해질 때가 있다. 조금만 스쳐도 상처가 나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에서 비명이 올라오고 마침내 그걸 터뜨리고야 마는. 그런 순간, 따뜻함이 지독히도 그리워진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나 눈빛이어도 좋고 따뜻한 노래여도 좋다. 거기에 갓 구워낸 부드러운 빵에 진하고 뜨거운 커피까지 있다면, 마음의 상처를 깁지는 못해도 차갑게 굳어진 뺨을 부드럽게 감쌀 수는 있을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풋내기들》에 수록된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를 읽으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 평온의 연약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기반은 약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너졌을 때 절차를 이행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몸이 떨린다.
이 소설에도 죽음이 등장한다. 더구나 죽음이 선택한 대상은 앤과 하워드의 아들 스코티. 그들은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워드, 이제 스코티는 없어. 아이는 없고, 이제 우린 거기에 익숙해져야 해. 둘이 지내는 것에."
그럼에도 앤과 하워드는 살아가겠지만, 스코티의 죽음을 기준으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나뉠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곁으로 새는 잔가지 없이 오직 스코티의 죽음과 가족의 고통에만 집중한다. 앤은 월요일이면 여덟 살 생일을 맞이하는 아들 스코티를 위해 쇼핑몰에 있는 빵집에 케이크를 주문한다. 퉁명스러운 빵집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월요일에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월요일 오후, 하굣길에 스코티는 친구와 걸어오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고 후 혼자서 집으로 걸어왔지만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앤에게 기대 있던 스코티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다. 의사는 그냥 잠을 잘 뿐이라고 하지만 앤은 스코티를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에 휩싸인다.
앤과 남편 하워드는 스코티 곁을 지키다가 차례로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잠깐 집에 들르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 남자는 말한다.
"스코티는 잊어버린 건가요?"
곧이어 퉁명스레 끊어지는 전화. 앤은 그 전화에 더욱 불안해졌고 곧장 병원으로 돌아갔다.
의사들은 여전히 스코티가 눈을 뜨지 않는 원인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깊은 잠에 빠져있던 스코티가 갑자기 눈을 뜨고 앞을 응시하더니 오랫동안 크게 악을 쓰고는.. 그대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월요일에 교통사고를 당한 스코티는 수요일 오전에 숨을 거둔 것이다.
부검이라는 절차 때문에 아이를 병원에 두고 집으로 돌아온 앤과 하워드. 그들이 집안 곳곳에서 스코티의 흔적을 보며 슬픔에 빠져있을 때, 또다시 이상한 전화가 걸려 온다.
스코티 말입니다. 스코티는 잊어버리셨나요?
스코티를 잊다니!
스코티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앤에게 들려온 그 목소리에 앤은 분노한다. 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빵집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곧장 차를 몰고 쇼핑센터에 있는 빵집으로 향한다. 영문을 모르는 빵집 주인은 이미 상한 케이크니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하지만 곧이어 앤의 얼굴에 퍼지는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서 밀방망이를 손에 든다.
케이크 가져갈 겁니까, 말 겁니까? 빵집 주인은 밤에 일한단 말입니다.
빵집 주인은 밤에 전화질도 하지. 이 나쁜 자식.
앤과 하워드 부부를 경계하는 빵집 주인에게 앤은 스코티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앤의 몸에 차올랐던 분노는 슬픔과 고통으로 바뀐다. 눈물을 흘리며 앤은 말한다.
우리 아들이 죽었어. 월요일 오후에 차에 치였다고. 우린 아이가 죽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어.
그제야 자신이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이 부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게 된 빵집 주인은 부부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오븐에서 막 꺼낸 시나몬롤빵과 커피메이커에서 따른 커피를 앤과 하워드에게 내놓았다.
아무래도 뭘 좀 드셔야겠어요. 갓 구운 롤빵이라도 좀 드셨으면 싶은데. 드시고 살아내셔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두 사람은 따뜻한 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들은 빵집 주인이 살아온 세월을 들으면서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었다. 자정에 찾은 빵집에는 아침 빛이 비쳐 들었지만 앤과 하워드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다.
따뜻한 빵으로 건네는 위로 따뜻한 온도를 지닌 존재라면,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위로가 된다. 슬픔의 무게를 덜어내지는 못해도 살아가기에 필요한 온기를 실어주는 것이다. 빵집 주인이 만든 빵은 부부에게 스코티가 없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온기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빵 굽는 기계들의 웅웅 거리는 소리들 사이, 작은 탁자에는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커피가 놓여있고, 아무 말 없이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부부와 그 부부에게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는 빵집 주인이 있다. 아침 햇살이 비춰도 빵집 주인은 일하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고, 부부도 떠나지 않는. 고요하고 따뜻하게 위로가 되는 풍경. 별 것 아닌데 이처럼 위로가 되는 것들이 있다.
따뜻한 빵이 건네는 위로
《풋내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쓴 열일곱 편의 원본, 1981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편집되고 변형된 상태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카버의 원고를 받은 편집자 고든 리시가 원본의 내용을 절반으로 줄여버렸다는 것. 이후 복원하기 시작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했고, 카버는 《풋내기들》이 완전히 복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88년 55세로 사망한다. 《풋내기들》이 완전히 복원되어 출판된 해는 2009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