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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un 16. 2020

버스 안에서

701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영천시장에서 701번 버스를 탔다.

 정동에서 친구를 만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카페 루소에서 지난 겨울 이후 쌓였던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정동에서 집에 가려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720번을 타거나 영천시장에서 701번을 타면 된다. 두 개 중 어떤 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하다가 친구가 사는 아파트 근처까지 같이 걸어가서 701번을 타기로 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도로 건너편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보였다. 보수공사를 하는지 주변은 공사차량과 안내판으로 정신없었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도로에 공사까지 겹쳐서 도로는 소음과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신호가 언제 바뀌나 보고 있는데,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검은색 오토바이 하나가 누워있었다. 분리대에 가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토바이 뒷부분만 보였다. 그리고 720번 버스가 멈춰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탔을 버스였다. 버스운전기사가 내리더니 망연한 표정으로 섰다. 갑자기 끼어든 오토바이를 못 본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보니 오토바이 운전자가 도로에 엎드린 채 쓰러져있었다. 공사장 직원이 차들이 오지 못하도록 수신호를 보냈고 주변에서 119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움직임이 없었는데, 내가 돈의문 박물관이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전 다시 한번 돌아봤을 때는 팔이 조금 움직였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오토바이 운전자가 괜찮기를 바라면서 친구와 걸어서 돈의문 박물관 언덕으로 올라가서 스위스 대사관을 지나 영천시장 버스정거장에서 701번을 탔다.


  모든 사람들이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버스 풍경이 아직 낯설다. 버스 구석 어딘가에서 작은 기침소리라도 들리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란다. 도착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방송만 들리는 버스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숨소리 대신 휴대폰 메시지 도착음이나 버튼 누르는 소리만 들렸다. 휴대폰으로 별로 관심도 없는 검색어를 클릭하다가 창밖을 봤다.

 오른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계속 이어졌다. 산을 깎아서 만든 단지였다. 예전에 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날 때는 산동네 집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낮에는 이불이 널려있고 밤이면 불빛이 모이던 동네였다.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동네는 비었고 집들은 헐렸다. 파란색 지붕을 덮은 마지막 집 하나만 주변이 붉게 깎이고 있는 산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느 순간 그 집도 헐렸다.

 기억은 시간이 담보하는 한계를 지나쳐오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아파트단지로 변한 그곳에서 마지막 남은 집의 지붕이 파란색이었는지 헷갈린다. 어쩌면 원래부터 아파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내가 지금 보며 생각하는 것들도 기억에 각인시켜 반복적으로 재생시키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 경계에 서서 어느쪽이 진실인지 자신없어하며 서있겠지.

 

 잘 달리던 버스가 속도를 늦추더니 한발자국씩 내딛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짐수레 하나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쌓아올린 폐지더미가 너무 높아 앞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수레의 몸체보다 폐지더미의 몸체가 훨씬 컸다. 버스가 천천히 옆 차선으로 들어섰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등이 많이 굽고 여윈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몸보다 훨씬 큰 폐지더미를 실은 수레를 끄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수레가 한쪽으로 기울 때마다 할머니의 작은 몸이 흔들렸다. 손잡이를 꽉 잡고 폐지더미의 무게가 쏠리는 반대쪽으로 몸을 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았지만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할머니가 손수레에 실린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틀기 직전, 누군가 도로로 내려와 할머니를 도왔다. 수레를 길가로 끌었고 근처 있던 몇 명이서 인도로 올렸다.


 에어컨이 약해서인지 햇빛이 비치는 자리에 앉아서인지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손으로 해를 가리고 창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먼지로 얼룩해진 유리창 바깥에 뭔가 얇고 엷은 것이 버스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나풀거렸다. 곤충의 날개였다. 명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진 형체로만 남은 존재의 날개. 한때는 하늘을 향해 날아갔을 날개는 해진 형체로 남았고 언젠가는 그 흔적조차도 사라지겠지. 누구든 그러지 않을까. 흔적의 상실을 향해 나아가는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다만 길에서 쓰러진 이들이 삶에서 스러지는 일이 당연한 수순처럼 오지 않기를. 쓰러진 오토바이 운전자와 커다란 수레를 끌던 할머니를 통과한 시간이 그렇게 말했다. 버스는 달리고 시간은 당연한 듯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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