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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Oct 15. 2020

늪..

 늪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본 적 있습니까. 그해 여름, 사람의 발길이 끊긴 늪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늪 자체의 냄새가 강렬하게 피어올랐습니다. 낮 동안에는 늪에서만 피어오르다가 저녁 바람이 불어오면 마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녁을 먹다가 코를 움켜쥐며 차가운 냉수를 들이켰습니다. 사람들은 늪이 썪어가고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썪어가고 있었던 걸까요. 대체 무엇이 들어있길래 그토록 빨리 썪어갔을까요.


 마을에서 늪과 가장 가까운 집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저는 썪어가는 냄새가 풍겨도 상관없었습니다. 장사를 접은 슈퍼는 이미 늪보다 더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냄새를 맡지 못했고 저는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있었으니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왔냐는 말을 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할아버지 뿐인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저는 말이 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늪이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요. 저는 늪에서 제가 알아야 할 모든 말을 배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키운 팔할은 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떠도는 소문과 사라진 것들의 소리를 들으며 말의 질감과 울림과 찰나의 의미를 익혔습니다. 그 중에는 술에 취해 늪을 잘못 밟았거나 울면서 늪으로 걸어들어간 이들의 마지막 소리도 있습니다. 가끔 제게 길을 물어본 이의 마지막 비명도 섞여있습니다.

 

 오해는 마시기를. 저는 왼쪽 오른쪽을 잘 구별하지 못했으니 늪을 피해 마을로 가는 방향을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마을에서 사라진 개나 고양이가 빠질 때는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번 먹이를 주었더니 늪까지 따라왔길래 공던지기를 하며 놀아주었는데 그렇게 되었다니. 늪에서는 우연한 일들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P가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빠진 것도 우연, 저를 기분나쁘게 쳐다보던 닭집 주인과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했던 학교 앞 문방구 주인이 빠진 것도 모두 우연입니다. 우연이 계속 겹치다보니 운이 나쁘게도 늪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던 제가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연이 겹치는 것만으로 의심을 받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다그치며 물어볼 때마다 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만 물어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저는 고개를 들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제가 늪에서 생긴 아이라는 걸. 그래서 어쩐지 음침한 구석이 있고 어쩐지 재수가 없는 것 같고 아이답지 않고 말수가 너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늪에서 생긴 아이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걸.

 늪에서 생긴 아이는 늪이 가장 편안했습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도 그만큼의 빛줄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종일 그곳에서 늪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는 해가 늪으로 떨어지면 달아오른 얼굴을 늪 속에 넣었습니다. 표면과 달리 늪의 내부는 고요하지 않습니다. 썩은 곤충이나 검붉은 물풀, 죽은 쥐들이 부유하며 떠다녔고 이빨을 드러낸 물고기들이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그곳에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사방을 쳐다보면 세상이 밝아보였습니다. 제 책가방 위에 올라앉아 놀고 있던 쥐를 붙잡아 언제나처럼 몇 번 놀아준 다음 늪에 던지고 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군, 왜 그렇게 웃고만 있어요?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내가 L의 행방을 물은 뒤로 지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옥상 구석에 시선을 둔 채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옥상은 점점 더 뜨거워져갔고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정말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처럼 L의 행방이 지군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때까지도 웃고 있는 지군의 팔을 잡았다.

-L이 어떻게 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지군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 웃다가 혼자 옥상을 내려가버렸다.

  



 오후 내내 나는 작업에 집중하지 못해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퇴근 무렵 지군은 점심시간에 하지 못한 L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근처 편의점으로 데려갔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자고 했다. 나와 지군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하나씩 사서 뜨거운 물을 붓고 창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주 앉아 컵라면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L의 행방은 반드시 듣고 싶었다.


 햇볕이 비치는 창가에 앉은 지군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옥상에서처럼 히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L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지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L과 저는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겁니까. 당신이 L과 함께 있는 걸 봤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게 좋아요. L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군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다가 'L은 별로 재미없는데.'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L. 보기보다 별로예요. 제가 들려주었던 붉은쥐 이야기 기억납니까? 붙잡아서 꼬리와 수염을 싹둑 자르면 방향감각을 잃고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던. 나중에 가위에 묻은 연한 살을 닦아낼 때쯤이면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지만 지루한 한 때 잠시나마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던, 제게 L은 그런 정도였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물었다.

-L은 어디로 갔습니까. 왜 회사에 나오지 않는 거죠?


지군은 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나무젓가락으로 컵라면을 휘휘 저었다. 덜 익은 면발과 빨간 무늬가 있는 얇은 어묵, 덜 풀어진 붉은 가루가 떠올랐다. 지군은 라면 한 젓가락을 먹고 말했다.

-L도 혹시 늪으로 간 거 아닐까요. 저도 가끔 가는데.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지 찾아볼게요.

 대체 지군은 왜 늪 이야기만 하는 것인가. 나는 지군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여겼던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지군, L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대체 늪 이야기는 왜 자꾸 하는 겁니까!

-늪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직접 속을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어요.

-늪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L은 어떻게 됐냐고!

 지군은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컵라면을 휘저으며 자기 말을 할 뿐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어느날 할아버지도 사라졌습니다. 늪에 하얀 고무신과 소주병이 떠있는 걸 보고 할아버지가 늪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요. 작은 마을에서는 소문이 생겨나고 자라서 퍼지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눈에 생기가 넘쳐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을 굳이 믿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L은 어디로 갔느냐고...

 잠겨들어가는 내 목소리는 지군의 열에 들뜬 듯한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붉은 국물이 후룩 쏟아졌고 불은 면발이 플라스틱 채반에 걸러졌다. 쓰레기통에서 음식물 썪는 냄새가 올라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까지도 지군은 혼잣말을 하며 웃고 있었다.

 편의점 문을 열자 뜨겁고 비릿한 바람이 불어왔다. 막바지에 이른 여름이 뿜어내는 열기로 눈앞의 도로는 녹아가고 있었다. 늪처럼 끈적거리며 신발에 달라붙는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나는 작업장이 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작업장 어딘가에 L이 남긴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찾아보기로 했다. 지군은 편의점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편의점 창가에 앉아 혼잣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쳐다보았다. 사방으로 뻗친 햇살에 반사되어 검게 물든 유리창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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