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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Mar 28. 2022

기억을 묻는 진혼곡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차갑게 얼어붙지 않도록 숨을 쉬어라.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밤에도 하얀 입김을 불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라. 살아서 호흡하는 생명은 얼어붙지 않는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아도 쌓일 틈 없이 녹을 것이다. 심장에서 솟아오른 따뜻한 피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으니까.

 차갑게 얼어붙지 않도록 기억을 기억하라. 침묵으로 틀어막은 시간 속에서도 망각의 더께에 파묻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려라.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면 기억은 얼어붙지 않는다. 고통으로 점철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새로운 피를 흘리는’ 이들이 ‘작별’을막아내고 있으니까.


 내가 쓸 수 있는 언어가 현상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다면 소리조차 내지 못한 한을 풀어낼 수 있다면 문장이 이토록 툭툭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얕은 생각과 슬픔으로 시작한 문장은 수평선 너머의 시간을 끌고 오는 역사를 마주하며 자주 부러졌다. 서툴게 맞춰가는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슬픔에 젖어가는 시간을 들여다본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비극으로 점철된 제주 4.3 사건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한 편의 일인극처럼 펼쳐진다. 하얀 천이 길게 걸린 무대의 공간적 배경은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 시간적 배경은 제주의 현재와 과거이다. 무대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다. 따뜻한 존재와 얼어붙은 존재의 구분도 없다. 생은 사에게 작별을 고하지 않았고 망각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는 듯 꿈과 생시가 모호한 상태로 흘러갈 뿐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죽어가는 영혼들이 찾아와서 생전에 가장 간절했던 것을 하고 사라지는' 무대는 한 번도 제대로 인사를 건네지 못한 아픈 역사에 대한 기록이자 소리 없이 묻힌 이들을 향한 진혼곡이다.  

    

 어떤 역사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죄를 물었다. 시대의 광기는 ‘절멸’이라는 그릇된 이념을 품으며 검게 부풀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조차 죄인으로 몰아넣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가족이 총칼에 피를 흘리고 집이 불타고 마을이 사라졌다. 바닷가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이 쓰러지자 바다가 밀려들어왔다. 학살의 흔적을 삼켜서 쓸어갔다. 거대한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갔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가족과 친구, 이웃의 죽음을 목격한 뒤로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즉 ‘절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꿈속에서만 4.3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속삭이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겨우 입을 열 수 있게 됐을 때는 망각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쌓여버린 뒤였다. 그렇게 ‘작별’은 무심하게 흘러버린 세월과 방치된 역사의 무관심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강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작가이다. “신경이 살아날 때까지 삼분에 한 번씩 바늘로 찌르며 피가 흐르”는 고통을 견뎌가며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완성되지 않는” 작별을 이어가기 위해 작가는 소멸이 아닌 생성을 선택한다. ‘절멸’로 스러진 이들이 ‘불꽃’으로 다시 솟아나서 기억될 수 있도록 '작별'을 유예한다.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이라는 고백은 “무엇을 돌아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작별>)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작별하지 않는다》에 다다랐을 때는 고통의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숨 쉬는 순간마다 고통을 겪는 것으로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거대한 망각의 바다가 밀려와 기억을 송두리째 휩쓸어가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묻혀버린 이들의 죽음과 “작별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며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작가의 무대 앞에서 한동안 멍해졌다.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엎드린 봉분들” 사이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얀 천이 길게 걸린 무대로 올라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억하고 기록하자고, 진혼곡은 밤새 그렇게도 슬프게 울렸나 보다.     

 마른 갈대만 무성하던 인적 드문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울기 시작했다. 고인 웅덩이에 검은 하늘만 보였던 계곡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얼어붙어있었던 것이다. 봄이 되기를 기다렸던 거다.


 어느덧, 다시 봄이다. “송장 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현기영 <순이삼촌>)하게 열리게 하는 자연의 무구함이 두려워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계절, 활주로에 파묻힌 채 비행기들의 무게에 짓눌리는 하얀 뼈들의 고통이 침묵으로 전해진다. 덮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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