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떨어지는 첫 순간을 좋아한다. 굵은 한 방울이 떨어져 흙이 젖어가는 순간과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각자 다른 높낮이의 소리를 내는 순간, 그러니까 비를 빨아들인 흙냄새가 퍼지기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찰나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안간힘이 느껴져 더 애절하다.
처음이라고 지칭한 일정 순간을 지나고 나면 빗소리를 머릿속에서 균일한 음으로 저장되어간다. 안간힘도 애절함도 무수한 빗줄기 속에서 희석되어간다.
이모에게 그게 진짜냐고, 빗소리가 정말로 사월에는 미 정도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느냐고 물어보자, 이모는 얼굴을 조금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다고, 정말 빗소리가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그 뒤로 이모는 한 번도 그런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매일 밤, 밤새 정감독의 팔을 베고 누워서는 혹시 날이 밝으면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러다가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또 움직이면 그가 깰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있던, 그 빗소리 말이다.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
지붕이 있는 곳에서 비를 긋고 있을 때면 비의 질감이 더 잘 느껴진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다 보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달라지는 빗소리가 어떤 높낮이로 떨어지는지 몹시 궁금해진다. 그런 식으로 빗소리를 들어봤던 적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이모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과거의 이모와 현재의 이모에 대해 풀어놓는다. 화자의 이모는 가족들의 입장에서 볼 때 '괴상한 아이'였고 종잡을 수 없었다.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차정신이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여고시절부터 파멜라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고 다녔으며 마침내 미국인과 결혼해서 파멜라 차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모는 이십 대의 젊은 시절 잠깐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극장에 영화가 걸린 뒤 그 영화를 찍은 정감독은 충무로 다방에서 만난 이모의 손을 잡고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따라나선 곳이 서귀포였다. 이모는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 함석지붕 집에서 사월에 살림을 차려 칠월까지 함께 살았다. 이모는 '한 번도 그런 빗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며 함석지붕에 떨어지던 그 빗소리를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라고 추억한다.
처음 '나'는 여자친구였던 진경과 함께 뉴욕에서 플로리다의 작은 해안마을 세바스찬에 살고 있던 이모를 찾아갔다. 그때 이모는 남편 폴과 함께 살고 있었고 행복해보였다. 이모네 집의 와인저장고에는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마시지 못할 정도로 많은 와인이 있었다. 화자인 나, 여자친구 진경, 이모는 밤마다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맛보았다. 그때마다 이모는 '그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화자는 이모가 예전에 영화배우를 했다는 사실과 이모의 남편 폴이 췌장암 말기라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화자가 진경과 결혼한 뒤로 다시 이모를 방문했을 때, 이모는 혼자 살고 있었다. 남편 폴의 암이 재발하여 세상을 뜬 것이었다. 셋은 다시 와인을 마시며 이모의 숨겨왔던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배우 활동을 하던 당시 정감독과 서귀포로 도망갔던 사랑의 도피와 정감독의 가족이 찾아와 혼자 남게 되었고 뱃속에 있던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해서.
그때 이모는 T.S 엘리엇의 <내 사중주 중> 중 일부를 들려준다. 모든 기다림 안에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들어 있다는, 기다리면 어둠은 빛이 되고 고요는 춤이 된다는 시를.
나는 내 영혼에게 말했다, 고요하라, 그리고 기다려라 희망 없이
희망이란 그릇된 것을 위한 희망일지니 ; 기다려라 사랑 없이
사랑이란 그릇된 것을 위한 사랑일지니; 그럼에도 믿음은 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모두 기다림 안에 있다.
기다려야 생각 없이, 너는 아직 생각할 준비가 안 돼 있을지니:
그러므로 어둠은 빛이, 그리고 고요는 춤이 되리라.
폴이 죽은 뒤 이모는 폴이 환생해서 찾아온다는 서귀포에 와서 정착하게 된다.
'나'는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아내 진경과 아이들과 함께 이모를 찾아간다.
이번에 이모는 '도미누스 에스테이트 1984년 산 와인'을 꺼낸다. 1984년은 이모와 폴이 결혼한 해였고 그 기념으로 폴이 그해에 나온 포도주를 한 상자 구입한 것이었다. 폴이 죽은 뒤 겨우내 이모는 정원에 앉아 폴과 함께, 그러니까 죽은 폴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의식처럼 그렇게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두 개의 잔을 준비해서 폴 한 잔, 이모 한 잔 하는 식으로.
서귀포에서 만난 이모의 얼굴에서 '나'는 이모가 젊은 시절 얼마나 예뻤을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내 진경과 화자인 내가 포도주를 맛볼 때 이모는 폴이 종이에 적어둔 빈티지 정보를 읽는다.
"겨울 강수량은 35.68인치로 약간 부족했지만 11월과 12월에는 25인치가 내렸다. 5월, 6월, 8월은 기온이 적당했는데, 7월과 9월은 어찌나 무더웠는지 화씨 100도가 넘는 날이 스무날이었다. 7월에는 엿새, 9월에는 여드레였다. 그러면 도합 14일로 나머지 엿새는 어디로 갔느냐? 그건 나도 모르겠다. 1984년 9월 2일에 수확을 시작해 1984년 9월 12일에 수확을 마쳤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
이모는 말했다. 정감독의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왔었다고. 이모를 만나고 싶다는 정감독 아들의 말에 이모는 자신이 정감독과 함께 했던 마지막 식사를 떠올린다. 서귀로 함석지붕 집으로 찾아왔던 정감독의 아내와 정감독, 아들, 그리고 이모까지. 그렇게 넷이서 사각 테이블에 앉아 짬뽕을 먹었는데, 이모는 부인에게는 미안하고 헤어질 생각하니 눈물이 나서 '면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짬뽕을 먹었다고 했다.
이모는 정감독 가족과 마지막 식사를 했던 중국집에, 이제는 정감독의 아들을 만나러 다시 찾아간다. 정감독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이모에게 만나자고 한 것이다. 2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이모는 정감독의 아들과 오래전 이야기를 나눈다. 중국집을 나온 뒤 정감독이 죽을 때까지의 일들과 서귀포 함석지붕 집에 살던 시간들에 대해서.
"그때 짬뽕 먹을 때 저는 계속 선생님만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으셨어요. 먹는 내내 선생님 정수리께를 보는데,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어떤 슬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요. 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든 소설이든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선생님 그 정수리 보면서, 그때 그 짬뽕 맛이 나려나 모르겠어요."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
'나'는 이모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누군가는 태어나 자라고 사랑하고 생을 마감하기도 했을 시간들 속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나머지 시간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감독의 아들을 만나고 이모의 집으로 돌아오는 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아스팔트와, 가끔씩 가로등으로 밝아지는 도로와 그 불빛들 바깥의 어두운 밤'을 바라보며 숲과 산과 호수와 안개과 구름과 태풍과 소나기와 빗줄기를 생각했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을 시간들을 따라가며 사월의 미와 칠월의 솔을 거쳐 그 여름의 짬뽕을 생각한다.
생에서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시간들과 뜨겁지 않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사이에 남아있었을.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미와 솔 사이의 기간을 보내던 시절의 이모가 고개를 숙이고 먹었던 짬뽕은 맵고 짜고 아픈 뒷맛을 남아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의식을 잘 치르고 옛사랑이었던 정감독의 아들과 나눠먹은 짬뽕의 맛은 예전과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를 지나온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의 빗소리와 햇빛과 웃음과 눈물은 어디로 흘러가 고여있을까. 어쩌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시간의 빈 곳에는 햇빛을 빨아들인 와인과 맛을 모르고 먹었던 짬뽕 같은 것들이 남있을지 모른다.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뒷맛이 오래 남는 그런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