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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드롬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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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Oct 10. 2024

[연재소설] 11. 아도니스 증후군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동엽은 배탈이 났다며 먼저 집에 갔고, 송이와 지후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송이는 방으로 직행했다. 묶었던 머리를 풀고 불편한 정장 재킷과 치마를 벗어 던졌다. 두 사이즈 큰 면티와 허리가 고무줄로 된 청바지로 갈아입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방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는 먼지가 붕붕 떠다니고 귀에는 기계음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편안해진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마우스에 손을 올리자마자 거치형 우울 측정기가 울렸다. 

스물한 살 현남우, 버스로 네 정거장 떨어진 흥함대학교의 학생이었다. 


신상 조건이 비슷한 다른 증후인들은 연애나 취업에 관한 고민이 많았는데, 이 학생은 아도니스 증후군이었다. 아도니스 증후군은 남성들이 외모 때문에 강박이나 우울증을 겪는 증상인데, 송이도 처음 접하는 케이스였다.


“바로 가실 거죠? 스마일 건 챙기세요.”


우울 측정기에 뜬 내용을 핸드폰으로 전송받은 지후가 방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이미 출장 가방을 메고 있었다. 송이는 의자에 걸어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스마일 건을 등에 멨다.


송이와 지후는 버스를 타고 흥함대학교 역에서 내렸다. 정류장부터 대학교 정문까지 이어진 대학로는 특유의 젊음으로 활기찼다. 도로 양옆으로 즐비한 식당과 카페, 옷 가게의 개성 넘치는 간판과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언덕길을 올랐다. 


정문을 통과하자 그리스 신전처럼 지어놓은 대학교 건물들이 송이와 지후를 내려다봤다. 벤치나 잔디처럼 앉을 수 있는 곳은 가을 햇볕을 쬐러 나온 학생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현남우가 있는 D동으로 향하면서 송이는 감상에 잠겼다. 카이스트를 열두 살에 졸업했으니까, 대학교에 오는 건 17년 만이었다. 학업과 연구에 매진하느라 캠퍼스 생활의 맛을 몰랐다.


D동은 패션디자인학과 건물이었다. 과 이름에 걸맞게 학생들의 차림새도 각양각색이었다. 동전만 한 피어싱과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자유분방한 남학생도 있었고,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녀도 눈에 띄었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워 보였다.


현남우는 D동 3층 강의실에 있었다. 송이는 문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안을 살폈다. 강의실의 생김새가 송이가 알던 것과 사뭇 달랐다. 벽면에는 얼굴 없는 마네킹과 스탠드 옷걸이가 여럿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모둠으로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 탁자 네 개가 나란히 있었다.


남우는 빈 강의실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서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이와 지후가 강의실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남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에 든 팩트로 얼굴을 두드리고 있었다.


“현남우?”


송이가 다가가자, 남우가 의아한 눈으로 송이를 보다가 뒤에 서 있는 지후를 발견하더니 인상을 썼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송이와 지후를 번갈아 훑고는 두통이 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현남우는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그린 듯이 반듯한 눈썹, 부리부리한 눈망울, 높고 얄팍한 콧대, 둥글게 튀어나온 광대와 도톰한 입술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아름다웠으나 전체적으로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이목구비가 강하게 자기주장 하는 피카소의 초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현남우 씨 맞으세요?”

이번엔 지후가 물었다.

“어우, 잠시만요.”

얇고 높은 목소리로 남우가 말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지후가 다가가려 하자 남우가 손을 들어 제지하더니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어우, 머리야.”

“왜 그러세요?”

“짜증 나게 잘생겼어.”

남우가 지후를 흘겨봤다.


지후가 어리둥절한 채로 송이를 바라봤다. 송이는 그제야 아도니스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가 잘생긴 사람을 보면 질투를 느끼고, 심한 경우 두통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윤지후가 잘생겼다고? 송이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지후를 쳐다봤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지후가 물었다. 송이는 아니라고 둘러대고는 스마일 건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지후가 남우에게 빠른 속도로 설명했다.


“놀라지 마세요. 이건 두통 증상을 완화해 주는 주사구요, 저흰 신드롬이라는 단체에서 나왔구요, 남우 씨 같이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해주고 있습…….”


지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탕! 소리가 났다. 송이가 남우의 허벅지를 향해 총을 쏜 것이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벅지를 싸매고 있던 남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을 느끼더니 이내 표정이 풀어지고 차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어머, 신기하네. 두통이 싹 사라졌어. 이마 좀 만져 봐요. 열 내려갔는지.”


남우가 지후의 손을 잡고 자기 이마에 가져가려 했다. 지후는 몸을 쭈뼛대며 손을 뺐다.


“자, 지금부터 이야기해 봐.”


송이가 남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명절증후군이었던 지영선 씨가 제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늘어놓더니 우울지수가 낮아졌는데, 이번에도 그 방법이 통하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뭘요?”

남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 어떻게 왜 생겼는지.”


송이가 말했다. 남우는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듯 눈을 모로 뜨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어렸을 땐 옷에 관심이 많았어요. 옷만 바꿔 입어도 사람이 달라지잖아요, 알죠, 누나? 그 매력에 푹 빠졌지, 뭐예요. 이쪽은 성함이…… 아, 지후 씨. 저보다 형 맞죠? 형이라고 부를게요. 지후 형도 기성 슈트를 입고 있지만 어깨 라인에 맞춰서 소매를 위로 좀만 올리기만 해도, 어때요, 훨씬 낫죠? 근데 형, 옷걸이가 좋다. 저 이번에 졸업 전시회 준비하는데 모델 하실래요?”


“그만.”

지후를 요리조리 뜯어보는 남우를 송이가 제지했다.

“본론만 말해.”


남우는 알겠다며 넉살 좋게 웃어넘기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근데 대한민국 사회가 그렇잖아요? 옷만 잘 입는다고 되는 게 아닌 거야. 대학교 오니까 더 그래. 아무리 명품으로 휘감아 봐야 얼굴 잘난 놈 못 따라가는 거지. 그때부터 얼굴에 손 대기 시작했어요. 저기, 누나, 형, 내 코 봐봐요. 잘 됐죠? 이번에 계약금 나오면 콧방울 살짝 집으려고요.”


남우가 두 손가락으로 자기 콧방울을 집어 보였다. 송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우를 쏘아봤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고 있었다.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후의 말에 남우는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고개를 꺾어 지후의 코안을 들여다봤다. 지후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남우는 강의실이 꽉 차도록 새된 소리를 내며 깔깔댔다.


“형은 코가 정말 예쁘네. 이러니 나한테 안 해도 된다고 하지. 나는 콧날 세우는 데만 삼백 들었고, 이번에는 백오십이 들 건데, 돈 퍼부으면 뭐 하나 몰라. 나는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겠다.”


갑작스러운 자기 비하에 지후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지금도 충분히 멋져요.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렇게 큰돈을 써요? 그냥 생활비로 써요.”

남우가 자기 눈과 코를 하나씩 짚으면서 말했다.


“앞트임하고 콧날은 알바비, 이번에 콧방울은 계약금.”

“계약금이요?”

“목숨 조금 떼어 팔면 돈을 준다잖아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개이득 아녜요?”

남우가 또 한 번 높은 톤으로 깔깔댔다.


“목숨……이요?”


지후가 눈을 번쩍 뜨고는 송이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남우의 수다에 지쳐있던 송이도 자세를 고쳐잡았다. 남우가 지갑에서 파란색 명함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여기 알아요? 방금 왔다 갔거든요. 3개월에 삼백만 원, 1년에는 천오백만 원 준대요. 일단 3개월 치만 팔아보고 괜찮다 싶으면 1년 팔아야지. 그 돈 받으면 입술에 필러 넣고, 팔자 주름도 좀 지울 거야. 알바보다 낫잖아요? 계약해 보고 괜찮으면 형한테도 소개해 줄게요. 소개받아서 오면 10퍼센트, 소개한 사람은 20퍼센트 더 쳐준대요.”

남우가 신나서 떠들어 댔다.


송이는 D동에서 본 검은 정장을 입은 남녀를 떠올렸다. 딜레마 직원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왜 목숨을 팔아가면서까지 성형수술이 하고 싶은 거예요?”

지후가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형, 내 가치는 외모에서 나오는 거예요. 외모를 꾸며야 남들이 무시 안 하죠. 게다가 잘생겨지잖아요? 그깟 돈, 목숨 안 팔아도 금방 벌어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남우가 대답했다. 지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남우를 바라봤다.


“부모님이 아시면 슬퍼하지 않으실까요?”


그러자 남우가 풋 하고 웃었다.

“어차피 1, 2년 빨리 죽어도 부모님은 못 보시잖아요. 지금 제가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우의 반박에 지후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계약서를 쓴 거야?”

이번에는 송이가 물었다. 남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이는 한 번 더 물었다.

“계약 내용이 어떻게 되는데?”


남우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저 이제 수업 가야 해요.”


지후가 황급히 명함을 꺼내 건넸다.


“그러면 시간 날 때 우리 사무실로 방문해 줄 수 있어요?”


“졸업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요.”

명함을 대충 훑어본 남우가 고개를 저었다.


“모델 필요하지 않아?”


송이가 턱 끝으로 지후를 가리켰다. 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 모양으로 “저요?”하고 말했다.


“형, 해주실 거예요?”


남우가 양손으로 탁자를 짚고 지후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송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사무실에 다른 모델도 있어. 좀 뚱뚱하긴 하지만.”


남우는 곧 사무실로 찾아가겠다고 말하고는 신이 난 채로 강의실을 나갔다. 송이와 지후는 강의실을 나서면서 대화를 나눴다.


“대학생한테까지 접근하다니 좀 충격인데요. 학생들한테는 어마어마한 돈이잖아요. 입소문 나면 금방 유행하겠어요.”


“그게 딜레마의 목표겠지.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 거.”


“그러니까요. 저라도 뚝 떼어다 팔 거 같아요. 불명확한 미래보다 당장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는 게 더 좋잖아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요하겠어. 하지만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건 아니잖아. 이건 생명을 다루는 일이잖아. 합법화는 반드시 막아야 해.”




남우가 찾아온 건 사흘 뒤인 토요일 아침이었다. 검던 머리가 샛노랗게 염색되어 있었고, 세로로 줄무늬가 들어간 짙은 녹색 재킷에 짙은 베이지색 치노팬츠 차림이었다. 빨간색 파우치와 주황색 스카프까지 사무실의 LED만큼이나 형형색색이었다.


사무실 안에 들어온 남우는 컴퓨터를 하는 송이 옆으로 가더니 “뭐 하세요?”하고 묻고는 옆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리다가 일어나서 사무실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는데 그러다가 동엽의 스나이퍼 건을 발견하고는 엎드려서 “푸슝, 푸슝” 입으로 총소리를 냈다. 


평소의 송이였다면 가만히 좀 있으라고 버럭 소리 질렀겠지만, 남우가 삐쳐서 돌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송이는 송이대로 남우가 필요했다.


“이건 뭐예요?”

남우가 물었다.


송이는 질렸다는 얼굴로 남우를 쳐다봤다가 이내 눈을 다시 떴다. 남우가 정신 능력 변환기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도니스 증후군은 처음 접하는 케이스로 어떤 능력 물약을 생성할 수 있는지 데이터가 없었다. 과학적 호기심이 마구 동하기 시작했다. 송이는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후에게 눈짓으로 지령을 보냈다. 반드시 물약을 만들어 내라, 이렇게.


“그건 말이죠.”

지후가 판매원처럼 남우에게 다가갔다.


“자기 능력을 발현시켜 주는 물약을 만드는 기계에요.”

“물약이요?”

남우가 관심을 보이자, 지후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표면으로 드러난 능력과 잠재된 능력이죠. 이 기계는 정신 에너지를 물약으로 변환하여 잠재된 능력을 발현해 줍니다.”


“아…….”

남우가 흥미를 잃은 듯한 소리를 냈다. 그걸 본 송이가 연기하는 투로 소리쳤다.


“야, 윤지후! 그러다가 패션 감각을 상승시키는 물약이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걸 마시고 작품을 만들면 졸업 전시회 취지에 어긋나잖아.”


송이의 말을 받아 지후도 연극톤으로 중얼거렸다.


“아, 맞네요. 남우 씨가 그 사실을 발설이라도 해 버리면 우리는…….”


지후가 남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네요, 남우 씨.”

“절대 말 안 할게요.”

남우가 지후를 붙잡았다. 지후는 고심하는 척 쓰읍, 하고 잇새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남우의 어깨 너머로 송이에게 비밀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송이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였다.


“좋아요. 들어가시죠.”


삼십 분 후에 남우가 정신 능력 변환기에서 나왔다. 땀을 뻘뻘 흘린 탓에 화장이 지워져 있었다. 짙은 화장에 가려져 있던 앳된 얼굴은 제법 귀여웠다.


지후가 변환기에서 물약을 회수했다. 손부채질을 하던 남우가 보라색 액체가 든 물병을 보고 “이거예요?” 하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지후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 소리치고는 물약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으나 남우가 빼앗으려 손을 휘젓는 바람에 물약이 지후의 손에서 떨어졌다. 약병이 쨍그랑하고 깨졌다.


컴퓨터를 하던 송이가 고개를 돌려 소란한 쪽을 쳐다봤다. 눈앞에 기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지후와 남우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송이의 코에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홀린 것처럼 물약이 깨진 곳으로 가서 지후와 남우처럼 코를 갖다 댔다.


그렇게 5분이 지났다. 냄새를 맡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머쓱해진 송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사람을 아주 홀리네.”


“방금 일어난 일이 제가 만든 물약 때문이에요?”

남우가 놀라서 물었다.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어쩌죠? 패션 감각을 올려주는 물약은 아니네요.”

지후가 안타까운 척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남우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탄했다.


“대박. 이걸 몸에 뿌리면 사람들이 다 나를 바라본다는 거잖아요?”

“그, 그렇겠죠?”

지후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남우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졸업 전시회 때 뿌리고 가야겠다.”


남우가 지후의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스케치북을 넘기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 졸업 전시회 콘셉트는 한국 전통이에요. 그래서 제가 형을 떠올리면서 몇 개 스케치해 왔어요. 이거 보면…….”


“저기, 저기, 남우 씨.”

지후가 말을 잘랐다.


“이건 나중에 꼭 해드릴게요. 딜레마랑 계약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겠어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변환기에서 남은 물약을 꺼내 정리하던 송이도 지후의 옆에 와서 앉았다. 남우는 한숨을 쉬더니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검은 옷 입은 남자랑 여자가 강의실로 저를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목숨을 돈으로 사겠다는 거예요. 아니, 황당하잖아. 그래서 안 한다고 했거든요?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돈 받아서 성형수술 해야 하지 않냐는 거야. 그때부터 혹하기 시작했죠.”


“그다음에는요?”

지후가 물었다.


“기대수명 테스트만이라도 해 보래요. 체온계처럼 생긴 기다란 막대를 줘서 입에 물었어요. 한 3초 뒤에 띠― 소리가 나고 입에서 뺐는데 액정에 기대수명이 89살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생각보다 길다는 생각이 딱 들죠, 그쵸? 어차피 늙어서 1년 더 살 바에야 팔아서 지금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맞잖아. 그래서 시험 삼아 일단 3개월만 팔기로 했어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쓴 거예요?”

“네.”

“다른 조건이나 준비해야 할 것은 없었어요?”

“음…… 계약 날까지 술, 담배, 과식 금지, 7시간 이상의 충분한 수면, 그리고…… 당일에 대여섯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어요.”

“뭘 하길래 대여섯 시간이나 걸린대요?”

“추출인가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추출이요? 추출은 어디서 하는데요?”

“다음 주 금요일에 명함에 적힌 주소로 오래요. 로비에서 전화하면 직원들이 내려온다고.”


그러고는 물었다.

“근데 이게 왜 중요해요?”


“딜레마는 목숨을 사고파는 사업을 합법화하려고 해.”

송이가 대답했다.


“아직은 너 같은 증후인에게 접근해서 목숨을 사들이고 있지만 합법화가 되면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겠지. 매력적인 제안이니까.”


“그게 왜 문제인데요? 본인의 결정이잖아요?”

남우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번에 팔아서 돈 벌면 다시는 안 팔 자신 있어? 살면서 돈 필요할 일이 얼마나 많을 거야. 그때마다 목숨 팔면 되지, 하고 생각하지 않겠어? 사람은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아.”


“쩝……. 그건 그렇네요. 그럼 팔 수 있는 한도를 법으로 정해놓으면 되잖아요.”


송이는 검지를 흔들며 단호하게 반박했다.


“양의 문제가 아니야. 목숨 거래가 가능한 순간 목숨에 경중이 생긴다는 게 문제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목숨’이 생겨난다는 뜻이지. 그런 인식은 사회적인 억압을 만들 위험이 있어.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 예를 들어 일부 노인, 장애인, 아이들이 더 힘이 센 사람들에게 ‘덜 중요한 목숨’을 팔게끔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이야.”


남우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합법화가 되기 전에 멈추려면 딜레마가 목숨을 사고팔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해야 해.”


“그럼 다음 주 금요일에 같이 가실래요?”


남우의 물음에 지후가 놀라서 되물었다.


“돈 못 벌 텐데 괜찮아요?”


“치, 그렇게 훈계해 놓고선 돈 받아서 성형 수술하라구요? 난 못 해요. 아니, 안 해!”

남우가 앵두색으로 칠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는 올라갈 수 없어.”

송이가 고개를 저었다.


“왜요?”


“위로 올라가려면 카드키가 필요해.”

“카드키는 누가 가지고 있는데요?”

“거기 직원들.”

“훔쳐드려요?”

남우가 해맑게 물었다.


“훔쳐?”

송이가 두 눈썹을 들썩였다.


“능력 물약만 빌려주면 직원들 꼬셔서 카드키 훔쳐드릴게요. 그쯤이야…….”


“아, 잠깐만.”


송이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남우를 제지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묘안이 마구 떠오르면서 막혔던 문제가 촤라락 풀려나갔다. 그 짜릿함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남우야, 아이디어 고맙다. 다음 주 금요일에 오후 두 시까지 여기로 다시 와. 네가 꼭 필요해.”

송이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남우는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면서 일어섰다. 사무실 문턱에서 다음 주 금요일에 만나자며 방방 뛰면서 양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남우가 사라지자 지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려구요?”


“훔쳐야지.”

송이가 눈을 반짝였다.


“지후야, 너는 그간 찾아갔던 증후인들한테 연락 좀 돌려.”

“뭐라고 말해요?”

“신드롬을 도와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송이는 동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엽이 밥을 먹고 있었는지 오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누나.

“지금 와.”

―네? 저 오늘 쉬는 날인데요?

“당장 와.”

―아, 왜요.”

“조수가 필요해.”

―조수요? 잠시만요.

수화기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1분여간 말이 없던 동엽이 헐떡거리면서 소리쳤다.

 ―택시 잡았어요. 당장 갈게요!



Image by  javi melia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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