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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드롬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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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Oct 12. 2024

[연재소설] 12.명절 증후군(2)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고 금요일이 됐다.

사무실에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졌다. 불 꺼진 사무실에는 문 열어주는 이가 없었다.


“저기요, 계세요?”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 소리에 소파에서 자고 있던 동엽이 눈을 떴다.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지난주 토요일 점심부터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송이를 보조한다고 하루에 두세 시간 쪽잠을 잤다. 오늘 새벽 세 시에 겨우 작업을 마치고 단잠을 자는 중이었는데 방해를 받은 것이다.


동엽은 CCTV 화면으로 사무실 밖을 확인했다. 니트에 쉬폰치마를 입은 여자가 양손에 천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으나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문을 열자 여자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저 기억하시죠? 추석 때 뵀는데…….”

“아……!”


동엽이 영선을 알아보고 엉거주춤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영선도 따라 인사하고는 동엽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제야 동엽은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안내했다.


동엽은 사무실 불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열 시 반이었다. 이 시간에 증후인이 왜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송이는 안방, 지후는 작은방에서 자는 중이니 미리 약속한 것 같지도 않았다.


영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무실 구석에 마련된 부엌으로 갔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냉장고와 싱크대뿐이었다. 영선은 가지고 온 천 가방에서 반찬통을 꺼내더니 냉장고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제가 도와드릴 능력은 안 되고 식사나 든든히 차려드리려고 왔어요.”


동엽은 그제야 영선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지후가 그간 찾아간 증후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신드롬에 도움을 줄 분들을 모집한다고. 한 시 반까지 사무실로 오는 건데 영선이 좀 이르게 찾아온 것이다.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반찬을 정리하는 영선을 지켜보던 동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송이의 일을 보조하면서 며칠째 패스트푸드만 먹다가 직접 만든 반찬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식사하셨어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동엽이 권했다.

“전 괜찮아요. 집에서 먹고 왔어요.”


영선이 수줍게 미소 짓고는 천 가방을 접으면서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낑낑대며 여기까지 왔을 텐데 반찬만 쓱 받고 보내는 게 좀 멋쩍었다. 차라도 대접할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도움 줄 방법이 있는데 하실래요?”


영선은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하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동엽은 영선을 정신 능력 변환기로 데리고 갔다. 물약을 받아두면 송이도 칭찬할 것이었다. 영선을 변환기에 들여보내고 기계를 작동시킨 후 즉석밥을 돌려 영선이 가져온 반찬에 밥을 먹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즉석밥을 하나 더 돌렸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변환기에서 종료 알림이 울렸다. 지후가 하던 것처럼 기계에서 물약을 꺼냈다. 맑은 먹물색을 눈앞에 들고 동엽이 인상을 찡그렸다. 먹었다간 굉장히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게 저의 능력 물약인가요?”

기계에서 나온 영선이 물었다.

“아, 네……. 근데 드시면 안 될 거 같아요.”

“왜요?”

“생긴 게 영…….”

“괜찮아요. 무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면서요.”


영선이 동엽이 손에 든 물약을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마개를 땄다. 고개를 젖히고 물약을 단숨에 삼키는 모습을 동엽은 걱정과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지켜봤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송이가 하품하면서 안방에서 나왔다.


“정신 능력 변환기 좀 썼어요.”


동엽이 대답했다. 송이가 동엽이 있는 쪽을 흘낏 보더니 코를 킁킁댔다.


“맛있는 냄새 나네?”

“영선 씨가 반찬 주셔서 밥 먹었어요.”


송이는 대꾸도 없이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제육볶음, 소세지야채볶음, 동그랑땡까지 내가 좋아하는 거 다 있네? 내 입맛을 어떻게 알았지?”


냉장고 문을 닫고는 송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로 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영선이 인사하자 송이가 소스라치며 놀라더니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아우, 깜짝이야. 언제부터 계셨어요?”

“네……?”

“방금 봤잖아요?”


동엽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전혀 기억에 없는데?”


“잠이 덜 깬 거예요? 그러니까 잠 좀 푹 자라니깐……. 아…… 아! 물약!”


동엽이 흥분한 목소리로 영선에게 말했다.


“영선 씨 능력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이리 와 보세요.”


동엽은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영선을 옆에 세워 놓고 쌔근쌔근 자고 있는 지후를 흔들어 깨웠다.


“지후 형, 지후 형!”


지후가 반쯤 뜬 눈으로 동엽을 바라봤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듯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고는 푹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 동엽 씨……. 벌써 열두 시에요?”

“아뇨, 아뇨. 밥 먹으라구요. 영선 씨가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왔어요.”

“응……? 영선 씨가 벌써 왔다 갔어요?”


눈앞에 영선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동엽이 씩 웃으며 영선을 쳐다봤다. 영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후의 얼굴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후는 졸려죽겠다는 얼굴로 동엽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동엽이 신난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영선과 함께 작은방에서 나왔다.


“영선 씨, 알았어요. 영선 씨는 명절 증후군을 겪었잖아요. 나를 안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물약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존재감을 지우는 거죠.”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송이는 씻지도 않고 곧바로 발동 조건 실험을 진행했다. 영선이 만든 물약을 챙겨 동엽과 영선을 이끌고 건물 1층에 있는 태양슈퍼 앞으로 갔다. 문이 활짝 열린 가게 안에는 건물주이자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계산대에 놓인 조그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저기에 들어갔다 나오세요.”


송이의 지시에 놀란 영선이 턱을 쩍 벌리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슈퍼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송이는 영선이 문을 지나쳐 가판대에 어슬렁거리는데도 주인아주머니가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걸 보고 그제야 안도했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영선이 자신감을 얻은 듯 과자 봉지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안도와 뿌듯함이 공존하는 미소를 지으며 송이에게 걸어오더니 손에 든 과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다시 가게로 돌아가 과자를 내려놓고 나왔다.


송이는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영선의 물약은 존재감을 지우기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은신은 아니었다. 소리를 내면 주변에서 영선의 존재를 알아챘고, 신드롬 사무실로 들어올 때 CCTV에 모습도 찍혀 있었다. 15분간만 지속되는 한계도 있었다.


실험을 마쳤을 땐 열두 시였다. 방에서 나온 지후가 대충 세수만 하고 소파로 다가왔다. 영선을 발견하고는 영선이 왜 아직도 여기 있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송이, 동엽, 영선은 마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영선이 점심을 차려주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평소 밥은 단출하게 먹는 송이였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텔레비전으로 본 명절날 집안 분위기가 사무실에 물씬 나서 흐뭇했다.


신드롬 직원들과 영선까지 네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영선이 싸 온 반찬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상을 치우자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렸다. CCTV 화면에 교복을 입은 학생이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연지가 사무실 문턱을 폴짝 뛰어넘어 와서 지후에게 수줍게 인사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너 쟤한테도 연락했어?”


송이가 지후를 흘겨봤다. 지후는 아, 하고 애매한 소리를 내고는 더 말이 없었다.


“학교는 어쩌고 왔어?”

“오늘 체험학습이라 일찍 끝났어.”


연지의 말투가 금세 딱딱해져 있었다. 심지어 송이가 아닌 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영선의 물약을 마신 것도 아닌데 없는 사람 취급받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연지의 달라진 인상을 보곤 금세 기분이 풀렸다. 용우에게 보고받기로 연지는 한 주에 두 번 이상은 꼭 사격장을 찾는다고 했다. 그게 생각보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모양인지 늘 화가 난 듯했던 연지의 인상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 뒤로 사무실 벨이 계속 울렸다. 증후인들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동엽이 주스를 따라 대접했다. 마지막 증후인이 들어왔을 땐 소파 주변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동엽과 지후는 맨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송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작년에 지후한테 무지막지하게 술을 먹인 최영호 할아버지부터 짝사랑에 매번 빠지는 팅커벨 증후인 유나, 그리고 동엽 씨의 첫 증후인인 균상이까지. 지후에게 연락을 돌리라고는 했지만 금요일 한 시에 누가 올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열두 명의 증후군이 왔다. 바쁜 일상 중에 일을 마치고, 연차를 쓰고, 학교가 파하고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것이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송이의 마음을 뜨겁게 덥혔다. 그동안 해온 일들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인정받은 듯했다.


벅찬 마음으로 탁자에 올라갔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시끌시끌했던 사무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지더니 사람들이 송이를 올려다봤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실 일이 있습니다.”


송이는 딜레마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딜레마의 최종 목표가 생명 거래의 합법화인 것을 밝히고 그게 왜 문제인지 일장 연설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제는 무엇을 도와주셔야 하는지 말씀드릴게요.”


그러고는 목소리 톤을 올려 분위기를 바꾸었다.


“먼저 SNS를 하시는 분 손들어 주세요. 영선 씨, 균상이, 유나…… 총 일곱 분이네요. 저희가 딜레마에 가서 촬영하는 것들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할 겁니다. 이분들은 그걸 다운받아서 SNS에 올려 퍼뜨려 주시면 됩니다.

다음으로 SNS를 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저희가 연락드리면 지인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이모탈 호텔의 야외 스크린이 보이는 곳으로 가주세요, 아시겠죠?”


“네에―!”

증후인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송이가 탁자에서 내려왔다. 임무를 받은 증후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명씩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데 대열에서 빠져나온 영선이 나가지 않고 쭈뼛거렸다. 송이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와 말했다.


“저도 같이 호텔로 가고 싶어요.”

“안 돼요. 물약을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도움은 다 주셨어요.”


송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증후인에게 그 위험을 감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선은 버텼다.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을 보아하니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도움이 필요하다는 문자 받고 오래 고민했어요. 나 같은 아줌마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내가 간다고 큰 힘이 되긴 할까?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졌어요. 


근데,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왜일까 떠올려 봤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아, 나 이 일이 하고 싶구나, 뭐가 돼도 좋으니 보탬이 되고 싶구나, 하고요. 저, 송이 씨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저도 합법화가 되는 걸 막고 싶어요. 이제 저도 능력이 생겼잖아요. 제 능력을 발휘해서 돕고 싶어요.”


“우리는 자아실현을 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송이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영선에게서 하연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 까닭이었다.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매일 같이 신드롬에 오면서도 이게 쉬는 거라던 말, 일손을 돕겠다는 말, 나 정말 괜찮다고 했던 말……. 그런 말들은 믿으면 안 됐는데……. 그런데 또 흔들리고 있다니. 마음을 다잡듯 송이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영선은 끈질겼다.


“저요, 아이를 낳고부터는 주어진 대로만 살았어요.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요. 이젠 저도 제가 옳다고 느끼는 대로 살고 싶어요. 기회를 주세요. 꼭 생명을 구해야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잖아요. 죽어 있던 삶에 의미를 찾아주는 것도 누군가를 살리시는 거예요.”


영선의 눈에 물기가 감돌았다. 송이는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대고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들러붙는 거머리 같은 사람을 떼어내는 건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대체 언제 출발할 거야?”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소파에 연지가 앉아 있었다. 송이는 기가 차서 물었다.


“넌 왜 안 갔어?”

“나도 갈 거야, 그 호텔.”

“넌 절대 안 돼.”


송이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연지는 콧방귀를 뀌더니 검지와 엄지를 붙였다 뗐다 반복하며 뻔뻔하게 말했다.


“자물쇠라도 있으면 내 능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갈고닦은 실력 구경시켜 줄게.”


송이는 구제 불능의 두 여자를 보고 질려버렸다. 지후와 동엽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할 뿐 도울 생각을 안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인원이 늘어날수록 변수가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실패할 확률도 늘어난다.


그때 남우가 “안녕하세요!”하고 발랄하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벌써 두 시가 된 모양이었다. 남우는 하늘색 리넨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짙은 감색 니트의 팔 부분을 묶어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아래는 밝은 베이지색 치노팬츠에 갈색 로퍼를 신고 있었고, 옆구리에 낀 새빨간 파우치는 여전히 제 존재를 톡톡히 드러냈다. 여기에 설렘 가득한 표정까지, 여행객이 따로 없었다. 송이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이제 남우가 호텔로 가기로 약속한 시각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송이는 신드롬 직원이며 증후인이며 구분 없이 탁자로 모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작전은 실행되어야 했다.



표지 Image by Richard Duijnste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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