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탈 호텔 로비에서 남우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5분쯤 기다리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남우에게 다가왔다. 상고머리를 한 남자는 대학교에서 명함을 준 사람이었지만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다른 한 명은 초면이었다. 둘 다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액면가는 남우보다 서너 살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남우는 스마트 안경의 콧대를 검지로 올리며 시야를 조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장면이 모두 지후의 태블릿으로 전송되고 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남우가 양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나 딜레마 직원들은 고개만 숙이고 석고상처럼 잔뜩 굳은 얼굴로 남우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눅이 든 남우는 말없이 딜레마 직원을 뒤따랐다.
25층 이상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닫힌 문에 딜레마 직원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영선의 모습이 비쳤다. 남우는 조마조마했다. 신드롬 사무실에서 영선의 능력이 무엇인지 들었고, 심지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들켜서 잡혀갈 것만 같았다.
상고머리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파란색 태그기에 댔다. 저거구나! 하고 남우는 눈에 힘을 주었다. 송이가 말한 문제의 카드키였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카드키의 움직임을 눈으로 부지런히 좇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상고머리가 카드키를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 도로 넣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뒤따라 탄 남우는 오호라, 하면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엘리베이터 안은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 층수는 25, 26, 27, 28층밖에 없었는데, 그중 28층에 파란불이 들어와 있었다. 남우는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빛 천장에 남우와 영선의 모습이 비쳤다. 왼쪽에 달린 CCTV을 주시하면서 지후에게 CCTV의 위치를 전송했다.
엘리베이터는 20초 만에 28층에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 지하철 개표구처럼 생긴 자동 게이트가 앞을 막았다. 인증을 거쳐야 투명한 플라스틱 문이 열리는 시스템이었다.
올백 머리가 먼저 기계 앞에 섰다. 목에 건 사원증을 파란색 태그기에 대자 “손바닥을 대 주세요.”하고 기계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귀에 꽂은 무전기에서 “정맥 인증을 한다고?”하고 송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올백 머리가 손바닥을 대자 2초 후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다음으로 상고머리가 인증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상고머리가 안쪽에서 어떤 버튼을 누르더니 “천천히 걸어 들어오시면 됩니다.”하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남우는 뒤를 돌아봤다. 시선을 받은 영선이 남우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남우가 들어가고 뒤에 선 영선까지 통과하자 곧바로 문이 닫혔다.
요란한 입장에 비해 내부는 지극히 평범했다. 남우가 걷는 복도 오른편은 사무실이었는데, 담장이나 가벽 없이 탁 트여 있어서 사무 공간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사무 공간은 천장과 바닥은 물론 벽까지 온통 하얬다. 내부에는 T자 형태로 붙어 있는 7개의 책상이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옆에도, 그 옆에도 줄지어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타자를 치거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훑어도 백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이 맡은 일을 구분하는 방법은 천장에 달린 표찰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표찰은 보안팀, 영업팀, 계약팀, 재무팀 순으로 달려 있었는데 보안팀과 영업팀의 규모가 가장 컸고, 계약팀과 재무팀은 상대적으로 협소했다.
남우는 곁눈으로 사무 공간을 열심히 힐끔댔지만 아무리 걸어도 새하얀 사무 공간과 T자로 놓인 책상, 검은 옷을 입은 직원들만 계속 반복됐다. 전혀 특이점이 없어서 송이가 잘못 넘겨짚은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한참을 걷자 복도 끝에 다다랐다. 불투명한 유리문이 달린 아치형 입구 앞에서 상고머리가 카드를 꺼냈다.
“이제 계약하신 대로 추출을 하러 갈 겁니다. 이 문을 넘으면 탈의실과 화장실이 나옵니다. 탈의실 안 83번 캐비닛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으십시오. 입고 온 옷과 소지품은 그 안에 넣어두시면 됩니다. 추출은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소요되니 용변도 미리 해결하십시오. 저희는 탈의실 맞은편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에 달린 태그기에 카드를 댔다.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이 열렸다. 직원들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왼쪽으로 가는 걸 확인한 다음 남우와 영선은 오른쪽에 있는 탈의실로 향했다.
83번 캐비닛을 열어보니 수술복처럼 생긴 펑퍼짐한 파란색 옷이 위아래 세트로 들어 있었다. 남우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라는 뜻으로 영선을 향해 손짓했다. 영선이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고, 남우가 파우치에서 분홍색 이어플러그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스펀지 재질의 이어플러그를 콧구멍에 쑤셔 박았다. 그다음 보라색 물약을 꺼내 손목에 두어 방울을 떨어뜨렸다. 향수를 뿌린 것처럼 양 손목과 목을 빠른 속도로 비볐다. 또다시 손목에 한 방울을 떨어뜨린 후 이번에는 가슴과 정강이 쪽에 문댔다.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남우를 보고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형님들! 옷이 없는데요?”
남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두 남자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우 쪽으로 걸어왔다. 이때다, 하며 남우는 리넨 셔츠의 옷자락을 괜히 한 번 털었다. 남우 앞에 선 두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코를 킁킁대더니 이내 눈빛이 몽롱해졌다.
남우는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뒤에 두 남자가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뒤따라왔다. 어우, 이게 평소였다면 얼마나 좋아, 속으로 아쉬워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칸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파우치에서 붉은색 물약을 꺼냈다. 임승우라는 사람이 만든 물약이라고 했다. 화장실까지 따라온 두 남자들에게 물약을 줬다.
“저기 형님들, 고생하시는데 음료수 좀 드세요.”
“헤헤, 감사합니다.”
“자, 쭉쭉 들이켜세요. 쭉쭉~.”
남우의 구호에 맞추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물약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3초도 지나지 않아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비틀비틀하다가 바닥에 픽 쓰러졌다.
“영선 누나! 영선 누나! 이리 오세요.”
남우가 목소리를 낮춘 채 영선을 불렀다. 그다음 남자들의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져 카드키를 꺼냈다. 목에 걸린 사원증도 뺐다. 그때 영선이 남자 화장실에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진 두 남자를 보고 소리 지를 뻔한 걸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겨우 참았다.
“이제 8분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가세요!”
남우가 두 개의 카드키와 사원증을 건넸다. 영선은 바통을 터치하듯 넘겨받고는 서둘러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남우는 쓰러진 두 남자를 낑낑대며 끌고 가 화장실 변기 칸에 몰아넣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영선은 운동화를 벗었다. 양말만 신은 채로 좀 전에 걸어온 긴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걸었다.
마음 같아선 뜀박질하고 싶었으나 소리를 내선 안 되니 경보하듯 엉덩이와 발끝에 힘을 주고 두 팔을 부지런히 저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숨이 가빠왔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목젖 아래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걷자 100미터 정도 앞에 자동 게이트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더욱 세차게 발을 놀렸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쿵 부딪혔다. 커다란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더니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갈비뼈 부근에 부러진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영선은 배를 움켜쥔 채 오만상을 쓰면서 고통에 찬 신음을 꾹 참았다. 아무리 참아도 소리가 삐져나올 것 같아 어금니로 혀를 씹었다.
영선이 부딪힌 건 전봇대만 한 남자였다. 어깨를 문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무엇과 부딪혔는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발치에는 영선이 쓰고 있던 스마트 안경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발견한 영선이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한발 빠르게 허리를 숙여 안경을 주워 들더니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영선의 온몸이 공포로 물들었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를 들키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남자가 바닥을 이리저리 훑으며 영선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영선이 보이는 것처럼.
“야! 뭐해? 빨리 가야지!”
또 다른 덩치 좋은 직원이 달려 나가면서 전봇대 같은 남자의 어깨를 쳤다. 동작이나 어투가 꽤 다급해 보였다. 전봇대는 그제야 영선에게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다음 들고 있던 안경을 재킷 주머니에 넣더니 앞사람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말소리가 영선의 귀에 얼핏 들렸다.
“호텔 셰프가 도망쳤대. 우울지수가 아주 높았는데 주사 맞기 싫다고 튄 거래. 이제 밥은 누가 해주냐?”
남자들이 사라지고, 영선은 서둘러 자동 게이트를 지났다. 때마침 검은 정장을 입은 덩치들이 하나둘씩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갈비뼈 부근을 부여잡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가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하던 손이 겨우 열림 버튼에 닿았다. 그러자 닫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딜레마 직원 한 명이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영선은 몰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다섯 덩치들 앞에 선 영선은 문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죽였다. 뒤에 붙어 서 있는 남자의 콧김이 정수리를 간질였다.
오를 땐 빠르게 느껴졌던 엘리베이터는 아주 느린 속도로 1층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문이 반쯤 열렸을 때 영선은 몸을 가로로 돌려 재빨리 문 사이를 빠져나갔다.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이제 물약의 효과가 사라지기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 송이와 약속한 카페로 달려갔다. 카페에 둘러놓은 울타리 너머로 검은 정장을 입은 신드롬 직원들과 연지라는 학생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영선은 멈칫했다. 상석에 못 보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등을 지고 있어서 얼굴이 안 보였으나 머리는 짧게 쳤고 덩치가 아주 좋았다. 게다가 부딪혔던 보안팀과 똑같은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이미 발각된 건가? 영선은 자신의 손을 봤다. 딜레마 직원들에게 훔친 카드키와 사원증이 들려 있었다. 사무실에 무단으로 침입했는데 거기에 절도죄까지 더해지면 더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약효가 다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영선은 입 주위를 두 손으로 동그랗게 가렸다. 그리고 아주 조그맣게, 그러나 애타게 송이를 불렀다.
송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영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로비에 있는 거대한 용 조각상에 숨어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왜 거기 있어요? 빨리 와요!”
송이가 다급하게 손짓했다. 영선이 배를 움켜잡은 채 절뚝대며 달려왔다.
“괜찮아요?”
영선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송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저요? 왜요?”
“보안팀에 붙잡힌 줄 알고…….”
영선이 상석에 앉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송이는 영선의 시선을 좇다가 웃음이 빵 터졌다.
“아하학! 그렇게 생기긴 했네. 여긴 임승우 씨에요.”
약 30분 전이었다. 송이, 지후, 동엽, 연지는 먼저 도착한 남우, 영선과 10분의 시차를 두고 호텔에 도착했다. 동엽은 스나이퍼 건을 넣은 케이스를 손에 들고, 허리춤에는 아이템을 넣은 복대를 찼다. 나머지 셋은 검은색 가죽 가방을 하나씩 멨는데 그 안에는 송이와 동엽이 밤새워 만든 신무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지후가 태블릿을 보면서 이제 들어가자고 했다. 화면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28층에 도착한 남우와 영선이 비쳤다. 일행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에서 내린 사람은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임승우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지후와 동엽을 향해 “늦어서 죄송합니다. 훈련이 길어졌습니다.”하고 승우가 고개 숙였고 송이는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새롭게 만든 무기 중에 볼풀공처럼 생긴 끈끈이탄과 해피탄의 주인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적이 아니라 저희를 도와주러 온 분이에요.”
영선에게 승우의 소개를 마친 송이가 표정을 바꾸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부딪힌 건 괜찮아요? 태블릿으로 보다가 얼마나 놀랐다구요.”
“전 괜찮아요. 어서 같이 올라가요.”
영선이 미간을 찡그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뇨. 안 돼요. 영선 씨는 역할을 충분히 했어요. 이제 병원에 가서 진료받으세요.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맘 카페에 글을 올려줘요. 그거면 돼요. 동엽아, 네가 택시 좀 잡아드리고 와. 우린 먼저 출발할게.”
“저는요?”
동엽이 질겁하자 송이가 고갯짓으로 위를 가리켰다.
“28층 화장실로 바로 와. 화장실 구조는 태블릿으로 봤잖아.”
송이는 지후, 승우, 연지와 함께 딜레마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후가 가방에서 황금색 끈끈이탄을 꺼내 승우에게 건넸다. 승우가 준비됐다는 신호로 고갯짓을 하자 송이가 영선에게 건네받은 카드키를 태그기에 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승우가 재빨리 CCTV를 향해 끈끈이탄을 던졌다. 완벽한 제구력으로 단번에 명중했다.
“끈끈이탄으로 시야를 가려놨으니까 안면 인식은 안 될 거야.”
송이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보안팀에서 해킹한 자료에서 본 바로, 딜레마에 있는 CCTV는 안면 인식이 가능한 모델이었다. 송이와 지후의 얼굴은 알려졌기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막힐 위험이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끈끈이탄을 만들었다. CCTV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얼굴 인식 기능만 마비시키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2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이번에도 승우가 손만 내밀어 좌우에 끈끈이탄을 하나씩 던졌다. CCTV에 황금색 막이 생기는 걸 확인하고는 모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다음 관문은 자동 게이트였다. 딜레마 사원증이 있었으나 정맥 검사까지는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나설 차례인가.”
연지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자동 게이트를 노려보더니 눈에 보이는 전선을 향해 검지와 엄지를 붙였다가 뗐다. 대여섯 번쯤 반복하자 자동 게이트의 안내 화면이 꺼졌다. 그래도 연지는 멈추지 않고 전선들을 마구 벴다.
“그만해도 돼.”
송이가 말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선 사람들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최대한 자연스럽게 걷는 거예요. 마치 직원인 척. 잘하실 수 있죠?”
송이 일행은 남우와 영선이 걸었던 복도를 걸었다. 파티션 속 보안팀 직원들은 제 할 일 하기 바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도 떨리지 않던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히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무사히 보안팀을 지나고 영업팀을 지나고 있었다. 영업팀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모니터만 바라볼 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29층으로 향하는 문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어! 송이야?”
누군가 송이를 불렀다.
“네가 웬일이야, 송이야?”
광한이 파티션에서 나와 송이를 향해 걸어왔다. 송이는 미처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다른 것에 온통 신경이 쏠려 광한이 영업팀 부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볼일이 있어서 왔어.”
“네가? 여기에?”
광한이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송이를 바라봤다.
“여기 게이트가 고장 나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러자 보안팀에서 두더지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뛰어!”
송이가 소리쳤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지후, 승우, 연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승우, 해피탄!”
지후가 연지의 가방에서 노란색 해피탄 두 개를 꺼내 승우에게 넘겼다. 승우가 송이 일행을 잡으러 달려드는 검은 정장 무리를 향해 탄을 던졌다. 탄은 목표물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탄 안에 든 약품 때문에 노랗게 물든 직원들이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대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땅땅 치기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탄을 맞지 않은 정장 무리가 거리를 좁히며 달려왔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승우와 지후가 번갈아 가며 탄을 던져 보아도 개미처럼 바글거렸다.
“누나! 가방 주고 달려요!”
지후가 소리쳤다. 송이는 메고 있던 가방을 연지에게 넘겼다. 지후와 승우가 탄을 던지며 달려오는 검은 무리를 막아섰다. 송이는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굵직한 고함과 비명이 섞여서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드디어 50미터 전방에 불투명한 유리문이 보였다. 저기만 넘으면 딜레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일념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연구로 혹사당한 몸이 송이에게 복수하듯 헐떡거렸다. 송이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유리문이 있었다. 송이는 넘어갈 듯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찾았다. 그런데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살려줘요!”
남우였다. 양팔이 결박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남우를 포박하고 있는 건 물약으로 기절시켰던 상고머리와 올백 머리였다. 10분이 지나 깬 모양이었다. 남우가 발버둥을 치며 발악했다. 그러나 건장한 두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뒤를 살핀 송이는 허탈한 한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여기까지인가, 좌절하고 있는데 어느새 뒤따라온 연지가 허공을 손날로 베는 시늉을 했다.
“아킬레스건을 따 버릴까?”
“안 돼!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안 돼!”
“왜 이럴 땐 착한 척이야? 그럼 어떻게 해?”
연지가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상고머리와 올백 머리가 벌에 쏘인 것처럼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더니 남우를 결박한 손을 풀고는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상고머리가 자신을 통제하려는 듯 제 뺨을 툭툭 쳐봤지만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되려 웃겨 죽겠다는 듯이 배를 잡고 바닥을 치며 웃었다.
“클리어.”
포복절도하는 두 명의 딜레마 직원들 뒤로 동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나이퍼 건을 견착한 채 사주를 경계하며 걸어 나왔다.
송이는 이렇게까지 동엽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칭찬에 인색하기로 정평이 난 송이였지만 절로 칭찬이 나왔다.
“동엽아, 아주 잘했어! 이제 설치해!”
동엽이 알아듣고 복대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지난주 토요일, 송이는 점심에 동엽에게 전화를 걸어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냉큼 사무실로 달려온 동엽에게 물었다.
“무기 중에 휴대하기 간편하고 광역 공격이 가능한 건 뭐가 있어?”
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동엽이 말했다.
“제 머릿속 무기 대백과사전에 누나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게 하나 있어요. KM18A1, 속칭 크레모아. 적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설치해서 뇌관을 터뜨리면 안에 들어 있는 700여 개의 구슬이 튀어 나가서 전방의 적을 살상하죠.”
동엽의 깔끔한 설명에 송이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걸 만들자.”
허리춤에서 크레모아를 꺼낸 동엽이 소리쳤다.
“절 엄호하세요!”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려 노란색 크레모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설치가 완료될 때까지 다른 일행들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승우는 몇 개 남지 않은 해피탄을 던졌고, 송이는 스마일 건을, 지후는 회색 리볼버를 난사했다. 쫓아오는 정장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스무 명 남짓만 제압하면 될 듯했다. 하지만 탄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동엽아! 얼마나 남았어?”
송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뒷걸음질하면서 발사 와이어를 풀던 동엽이 소리쳤다.
“조금만 더요!”
그때 팔뚝이 송이의 얼굴만 한 딜레마 직원이 럭비 선수처럼 돌진해 왔다. 송이가 재빨리 스마일 건을 쐈으나 탄이 다 떨어진 총에서는 틱틱, 하는 소리만 났다. 탄을 달라고 소리쳐봤지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저 어깨에 부딪히면 갈비뼈가 나가겠구나, 체념하려는 순간 동엽이 목청껏 소리쳤다.
“완료!”
동엽이 격발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송이는 옆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자 흠씬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 퍼졌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재빨리 일어서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동엽의 뒤쪽으로 피신했다.
쾅―!
동엽이 격발 스위치를 눌렀다. 하늘에 700여 개의 노란색 구슬이 퍼졌다. 하연이가 만들어 놓은 웃음을 유발하는 물약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것이었다.
구슬은 달려오는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덮쳤다. 노란색 얼룩이 묻은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허리를 젖히고 웃다가 뒤로 자빠지기도 하고 서로 부여잡고 웃다가 같이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성별과 직급 구분 없이 터뜨리는 웃음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냈다.
송이 일행은 닫힌 유리문 너머로 이 광경을 잠시 지켜봤다. 이제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가자.”
송이가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대려는데 연지가 손바닥을 내보였다.
“잠깐만.”
연지가 승우에게 말했다.
“오빠, 태그기 좀 부숴줄 수 있어요?”
승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동엽의 스나이퍼 건을 발견했다.
“잠시 그것 좀 빌려주십시오.”
동엽이 엉겁결에 총을 승우에게 넘겼다. 총을 받은 승우가 총을 뒤집더니 개머리판으로 태그기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쾅!
“아, 안 돼!”
동엽이 발악했으나 이미 늦었다. 쾅쾅! 승우의 손길 몇 번에 태그기가 박살 났다. 안에 들어 있던 노란색과 빨간색 전선이 훤히 드러났다. 그곳을 향해 연지가 손짓을 몇 번 했다. 여러 선이 모두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이렇게 해 놓으면 문이 안 열릴 거예요. 이제 가요.”
연지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었다.
표지 Image by Angga Ilham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