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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드롬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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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Oct 17. 2024

[연재소설] 14. 파랑새 증후군

엘리베이터는 29층으로만 운행했다.


2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갑작스럽게 어둠이 펼쳐졌다. 안쪽에서 번지는 은은한 파란빛이 겨우 사위를 밝혔다. 송이 일행은 약속한 듯이 숨을 죽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에 들어선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살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온통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천장에 세 줄로 끝없이 달린 형광등에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래층에서는 탁 트여 있던 공간이 허리까지 오는 담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담 윗부분은 유리창으로 막혀 있었다. 송이는 수족관에 온 아이처럼 유리창에 양손을 올리고 얼굴을 붙였다. 창 너머로 싱글 침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는데, 가로로는 5개, 세로로는 한눈에 세기 힘들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침대에는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마치 어른을 위한 인큐베이터를 연상케 했다.


“이거 찍고 있지?”


송이가 묻자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는 이거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야외 스크린으로 송출해. 동엽이는 증후인들한테 약속대로 실행하라고 연락하고.”


송이는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걸어갔다. 침대의 행렬은 계속 이어졌고 침대마다 사람이 빼곡히 누워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출입문이 나왔다. 문 상단에 달린 안내판에는 ‘추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송이가 출입문 옆에 달린 태그기에 카드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송이는 침대 사이를 거닐며 사람들을 자세히 살폈다. 팔에는 관이 꽂혀 있었고, 그 관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비닐팩으로 이어졌다. 팔에서 빠져나간 액체가 한 방울씩 팩으로 모였다.


언뜻 보이는 얼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파란 조명이 드리운 몸뚱어리는 마치 영안실의 송장처럼 보였다. 가슴팍이 오르내리지 않았다면 죽은 걸로 착각할 만큼 미동이 없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으스스했던 적 있으세요? 제가 지금 그래요. 여기에 누워 있었을 거 생각하니까 안에는 뜨뜻한데도 오한이 막…….”


남우가 양팔을 손으로 문댔다. 속삭이듯 말했지만 목소리가 꽤 컸다. 송이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 가운데에 검지를 댔다.


몇 명의 얼굴을 둘러본 송이가 허리를 세웠다. 밀폐된 공간, 파란 조명, 액체 추출…….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거대한 정신 능력 변환기야.”


송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동엽이 말이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누나가 만든 거라면서요?”

“작동 원리만 알면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그게 누군데요?”

“이 위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대체 무슨 물약을 만드는 걸까요?”

“이건 인간의 목숨을 추출하는 거야.”

“뭐라구요? 어우, 소름. 전 이제 나갈래요.”


동엽이 몸서리를 치며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송이도 문으로 가면서 말했다.


“다 같이 나가자. 증거는 충분히 모았어.”


송이와 일행들은 복도의 끝을 향해 걸었다. 어둠과 파란 조명에 감각이 마비되어 어디쯤 와 있는지도 잊어버렸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계속해서 걸었다. 드문드문 빈 침대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아치형 입구가 나타났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나란히 서 있는 엘리베이터 두 기가 보였다. 한 대는 1층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였고, 다른 한 대는 30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송이가 동엽에게 카드키 하나를 건넸다.


“나랑 지후만 위로 올라갈게.”


동엽이 뒤로 고개를 돌려 파랗고 긴 어둠을 한 번 쳐다봤다. 고개를 돌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송이를 바라봤다.


“저는요?”


“너는 남아서 침대에 누운 사람들을 깨워줘. 자신의 목숨 주머니는 반드시 챙기게 해야 해. 위에서 추출한 목숨을 다시 주입하는 방법을 알아 올게.”


“절 두고 가지 마세요.”


동엽이 송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송이는 동엽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너도 어엿한 신드롬 직원이잖아. 충분히 할 수 있어. 여기서 네가 가장 연장자인 거 알지? 동생들 잘 부탁해.”

송이가 동엽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동엽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송이는 지후와 함께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어둠은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6미터 높이의 돔 형태의 천장과 벽면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알루미늄 창틀 때문인지 거대한 새장처럼 보였다.

 

유리 너머로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발악하듯 빛을 쏟아냈다. 바람이 꽤 부는지 휘잉―하는 소리와 유리창 흔들리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퍼졌다. 어둠이 오기 전에 일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송이는 지후와 함께 흑색 대리석 바닥에 깔린 와인색 카펫을 따라 걸었다.


카펫은 세모난 철문 앞까지 이어졌다. 높은 층고만큼이나 거대하고 웅장했다. 철문에는 양각으로 풍경화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산을 중심으로 하늘에는 구름과 해가 떠 있고, 땅에는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바위 뒤로는 굽이진 소나무가 솟아 있고, 소나무 옆에는 폭포수가 흘렀다. 그 앞에는 거북과 학, 사슴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송이가 철문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웅장한 문이 위잉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점점 넓어지는 문틈 사이로 흑갈색의 원목 탁자와 검은 가죽 소파, 그 뒤 사무용 책상, 그 너머로 서울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오른쪽 벽에 놓인 천장까지 솟은 책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장에는 책이 비슷한 높이와 색깔에 맞추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시선을 돌려 왼쪽 벽면을 바라봤다. 직사각형 형태로 배치된 쉰 개의 모니터가 이모탈 호텔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파란 불빛으로 가득한 화면에서는 동엽과 일행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용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그 사람의 등 뒤로 하늘이 주황빛으로 노을 지려 하고 있었다.


“왔어, 송이야?”


남자 목소리가 반겼다. 역광 때문에 어둠에 드리워진 남자가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워질수록 발끝부터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차츰 색을 입어 나갔다. 파란색 정장이 모두 드러났을 때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경수 팀장님……?”


지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송이는 눈앞의 남자를 또렷이 응시했다. 신드롬을 나갈 때보다 볼살이 빠지고 인상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경수가 소파 상석에 앉았다. 멀뚱히 서 있는 송이와 지후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송이는 경계하는 눈빛을 유지한 채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다. 송이 옆에 지후도 앉았다.


“나인 줄 알았지?”


경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선한 눈매는 여전했다. 그게 오히려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송이는 적대감이 가득 담긴 투로 말했다.


“설마 했는데, 여기에 와서 확신했어. 이런 시스템을 구현할 사람은 선배밖에 없으니까.”


“회사망에 접속해서 가져간 자료랑 추출실을 봤으니까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따로 설명은 안 해도 되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


경수가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추출실은 너의 정신 능력 변환기를 본떠서 만들었어. 그런데 추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렇게 느린 속도로는 필요 물량을 채울 수가 없어. 어깨너머로 배운 걸로는 부족한가 봐.”


“정신 능력 변환기는 이런 목적으로 쓰려고 만든 게 아니잖아.”


“송이야, 크게 다르지 않아. 추출한 목숨은 능력 물약만큼이나 의미 있게 사용될 거야.”


“그걸 어떻게 믿어? 능력 물약마저도 오용되고 있는데. 일을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도록 돕는 각성 물약이 여기선 인간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데 쓰이고 있잖아. 스마일 주사는 또 어떻고? 우리가 처음 만든 것보다 농도를 짙게 했지?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우울지수를 강제로 떨어뜨려서 일의 능률을 올려야 하니까.”


“말 잘 꺼냈다, 송이야. 각성 물약의 효능이 좀 떨어져. 네가 만든 건 일주일쯤 지속됐던 것 같은데.”


경수가 여봐라는 듯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이것 봐. 부족한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여러모로 네가 필요해.”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 텐데? 난 선배가 하려는 걸 막으려고 왔어.”


송이가 경수를 노려봤다. 당당하게 그 눈빛을 받은 경수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네가 나를 도와줘.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했던 것처럼.”




4년 전, 스물다섯 살의 송이는 반쯤 미쳐 있었다. 꿈의 물질이라 불리는 상온 초전도체를 개발 중이었다. 8백여 번의 실험을 진행하였으나 성공할 듯 말 듯 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어서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마음이 달았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실험 이외에 모든 건 사치였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연구원들이 속 편하게 잠을 자거나 모여서 깔깔대며 밥을 먹으면 그 꼴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송이는 연구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직급이 높건 낮건 상관없었다. 비난과 비아냥에 가까운 말로 상대를 가차 없이 깎아내리며 실험에만 몰두하게 했다.


천이백 번째 실험에 실패했을 땐 스타팅 멤버가 아무도 없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갈 계약직이나 승진을 앞두고 울며 겨자 먹기로 부임한 사람들뿐이었다. 보다 못한 연구소장이 송이에게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지시했다.


송이는 터지기 직전인 몸을 이끌고 석 달 만에 집으로 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엄마, 아빠가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야 기억이 났다.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었다. 문자가 왔었나, 통화를 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송이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그날부터 연구소에 나가지 않았다.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만 나와달라는 책임 연구원의 부탁도, 그딴 식으로 살지 말라는 선임 연구원의 비난도, 앞으로 이 업계에 발을 못 들이겠다는 연구소장의 협박도 다 무시했다.


50평 크기의 집에서 5평도 되지 않는 방에 틀어박혔다. 불을 끄고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숫자와 그래프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가슴은 뜨거워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 그 생각만 어지러울 정도로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과는 분명한데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은 송이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주를 그렇게 보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진경수였다. 자기와 함께 카이스트를 다니던 천재 소년. 송이가 오기 전까지 막내로 귀여움받던 소년.


그 소년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송이는 자신을 못 견디고 도망친 연구원들에게 연락을 돌려 그의 거처를 수소문했다. 진경수는 여전히 카이스트에 있었다. 한걸음에 대전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방의 불을 켜고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은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 오래간만에 쬐는 햇볕에 머리가 잠시 어질했지만, 목표가 생긴 송이에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경수의 연구소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누가 봐도 연구원처럼 보이는 무리가 연구소에서 나왔다. 송이는 경수를 단번에 알아봤다. 14년 전보다 몸집도 커지고 성숙했지만 얼굴에 어릴 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과 눈썹을 살짝 덮는 앞머리까지 그대로였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가 웃었다. 햇살에 반사된 얼굴에서 광이 났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지? 송이는 답을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뜸 가서 말을 걸었다.


“대화 좀 해.”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움푹 들어간 볼과 툭 튀어나온 광대, 그에 비해 이글거리는 눈동자, 흡사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보이는 송이를 보고 경수의 동료들이 쑥덕댔다. 경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한 번 크게 뜨고는 이내 본래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을 먼저 보냈다.


경수는 대학교 내에 있는 카페로 송이를 데리고 갔다. 송이는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입 한 번 대지 않았다. 굳이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입맛이 썼다. 경수는 크림이 잔뜩 든 음료를 쪽쪽대며 맛있게 들이켰다.


“당신,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송이는 팔짱을 낀 채 경수에게 날을 세웠다. 그 말에 경수가 송이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송이의 얼굴을 통해 송이가 살아온 인생을 헤아려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10초 정도 후에 송이의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한테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겠다는 꿈이 있거든요.”


경수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이스트에 다닐 때도 경수는 항상 웃고 있었다. 송이보다 문제를 푸는 데 오래 걸리면서, 성적도 덜 나오면서, 뭐가 좋다고 방실방실 웃어댔다. 그게 고작 꿈 때문이었어? 송이는 기가 찼다.


“지난주 수요일에 인간이 뿜는 정신 기운을 감지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미세먼지 측정기를 개조해서요. 그게 상용화되면 사람들은 몸 상태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예요. 의학이 발달하고 삶이 더 나아진 것처럼,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죠?”


그러면서 바보처럼 웃었다. 송이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실적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다는 게. 송이는 열 살 이후로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연구는 언제나 결과를 요구했고, 그 결과는 경제적 이익을 수반해야 했다. 


음료를 쪽쪽 빨아대는 경수를 바라보면서 송이는 생각했다. 같은 꿈을 꾸면 나도 웃을 수 있으려나? 그래서 대뜸 말을 던졌다. 


“나도 그 연구에 끼워줘.”


하지만 송이는 연구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송이가 정부 산하 연구소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탓이었다. 경수에게 연구 자료만이라도 공유해달라고 부탁했다. 혼자라도 연구할 생각이었다. 고민에 대한 해답이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주, 송이에게 온 건 자료가 아니라 진경수였다. 그는 함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연구를 하자며 또 바보처럼 웃었다.


그길로 월세가 저렴한 흥함동에 연구소를 차렸다. 세상에 신드롬을 일으켜 보자고 연구소의 이름을 신드롬으로 정했다.


송이가 합류하자 연구는 빠르게 성과를 보였다. 송이는 경수의 연구를 디벨롭해 정신 능력 변환기를 만들어 냈다. 푹푹 찌는 변환기에서 성공적으로 물약이 만들어지자 둘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장점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질 것을 상상하니 송이의 얼굴에도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날이 송이가 가장 크게 웃어 보인 날이었다.


1년 동안 안정화와 상용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남은 건 연구 결과를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었다. 송이와 경수는 영업을 개시했다. 우울지수 측정기의 전원을 켜자 바로 알람이 울렸다. 첫 고객은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광한이었다.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게 만들자고 했잖아! 근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송이의 원망 섞인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목숨 판 돈으로 생활이 나아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경수가 뭐가 문제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숨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목숨이 필요한 사람들은 돈으로 사면 일거양득이지.”


“목숨을 살 수 있는 건 VIP층에 누워 있는 부자들뿐이잖아.”


송이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경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 회사는 그들이 낸 돈으로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어. 기부도 많이 하고, 수명 연장 연구에 막대한 투자도 하고 있어. 방문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찾아가서 주사 놔주고 몇 마디 들어주는 것과 비교해서 어느 게 더 세상을 낫게 만들고 있을까?”


“목숨쯤은 팔아버려도 된다고 종용하는 세상은 절대 좋은 세상이 아니야.”

“필요 없는 건 팔아야지.”

“세상에 필요 없는 목숨이 어디 있어?”

“목숨의 가치는 사람마다 달라. 여미경 씨 기억 안 나?”


경수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부드럽게 휘어 있던 눈매가 위로 솟았다. 눈동자에 얼핏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하연이가 죽고 난 후, 신드롬의 모든 업무가 중지됐었다. 버릇처럼 사무실에 출근했지만 시끄럽게 울려대는 우울 측정기를 보고 누구도 출동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일하면서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연이의 아픔은 알아채지 못했다는 회한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늪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건 의외로 경수였다. 하연이의 장례를 마치고 2주가 흐른 뒤였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송이는 놔두고, 경수는 광한만 데리고 출장을 나갔다.


증후인 여미경 씨는 버스 정류장에서 왕복 6차선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울지수가 ‘아주 높음’으로 나타났는데, 그를 증명하듯 눈동자에선 어떤 욕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수는 그녀를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걸 성공한다면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자책감과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욕적으로 미경에게 다가갔다. 말을 붙이려는데 갑자기 미경이 차도로 몸을 던졌다. 경수가 다급하게 그녀의 왼팔을 잡아당겼고, 달려오던 차가 끽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미경은 자동차 범퍼에 오른쪽 다리만 살짝 부딪쳤다.


경수는 허겁지겁 미경의 상태를 살폈다. 아스팔트 바닥에 쓸리면서 팔꿈치에 생긴 찰과상 외에 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경수가 아니었다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경수가 안도하며 미경을 부축했다. 그런데 비틀대며 일어선 미경이 경수를 노려봤다. 자신을 왜 살렸냐고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 시선을 거두며 미경은 경수의 손을 뿌리치고 절뚝이며 한 차선을 더 가더니, 한 번 더 몸을 던졌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 하연이는…… 그렇게 살고 싶어 했는데……. 그 여자는 왜! 겨우 살아난 목숨도 버리려고 하지?”


움켜쥔 경수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때 난 깨달았어. 목숨이 모두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누군가는 돈을 주고 팔라고 하면 얼마든지 팔겠구나. 그 깨달음에서 이 사업은 시작됐어. 시장의 원리에 따르니까 돈을 버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경수가 냉소했다. 송이는 안타까움이 담긴 얼굴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선배는 항상 이상을 꿈꿨잖아. 속물적인 내가 보기엔 허황하고 팔자 좋은 소리였지만, 그래서 선배가 필요했어. 선배 같은 사람이 있어야 세상은 바뀌니까. 선배라면, 내가 아는 선배라면 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경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고 싶으면 목숨을 팔면 돼.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 몫까지 살면 되니까.”


“그게 선배가 말했던 더 나은 세상이야?”


송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어.”


경수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싸늘해진 눈빛으로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야, 넌 항상 옛날로 도망치고 싶어 했잖아. 왜 그렇겠어?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이지. 삶이 무한하다면 후회? 그럴 필요가 뭐 있어. 그까짓 거, 다시 하면 되는데, 안 그러니?”


지후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경수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수의 등 뒤로 가을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송이는 곁눈질로 모니터를 힐끔댔다. 동엽이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줄 세워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있었다. 손목을 살짝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해피탄의 효력이 슬슬 끝나갈 때였다.


갑자기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뒤편의 유리창 쪽으로 걸어가더니 오른손을 유리창에 갖다 댔다. 구름 뒤에 숨어 얼마 남지 않은 태양 조각이 그의 손에 가려졌다.


“합법화는 시작일 뿐이야. 가야 할 길이 멀어. 송이야, 같이 가자.”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송이가 두려움이 서린 눈빛으로 물었다. 경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절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에 도전한 사람들이 비행기를 만들어 냈어. 내가 하려는 건 그런 거야. 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에 도전하는 것.”

경수가 고개를 돌려 송이를 바라봤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송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한땐 내가 손대기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오만했지. 나도 한낱 인간일 뿐이야. 그걸 인정하고 손 닿을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했어.”


말하면서 모니터를 곁눈질했다. 로비를 비추는 모니터 화면에서 경찰 무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니야, 송이야!”


경수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너 같은 천재가 왜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고 있어. 너랑 내가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어. 옛날처럼 같이 연구하자.”


경수가 손을 내밀었다.


송이는 다시 한번 모니터를 힐끔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탄 경찰들이 28층에서 내렸다. 빠르면 10분 후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10분 안에 경수를 설득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경수는 이미 꿈꾸는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를 붙잡아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그 연구는 좀 미뤄야겠는데?”


송이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향했다. 그제야 경수가 모니터를 쳐다봤다. 송이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화면을 응시하더니 표정이 험악해졌다. 경찰들이 28층의 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하아……. 송이야…….”


경수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찰로 붉어진 얼굴로 송이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우리는 같은 목표를 꿈꿨잖아. 똑같이 소중한 걸 잃었잖아. 우린 여기에 만족하면 안 돼!”


“선배, 인간은 참 복잡미묘해. 기계랑은 다르게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내잖아. 그래서 난 이 일이 즐거워.”


왠지 모르게 영선이 떠올라 송이는 바보처럼 웃었다. 꿈이 있다고 말하던 경수처럼.


하지만 경수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경수는 분노를 참는 듯이, 한 글자씩 꾹꾹 눌러 가며 물었다.


“하연이 안 살릴 거야?”


갑작스럽게 언급된 이름에 송이는 잠시 멍해졌다. 하연이를 살려? 신에게 도전한다는 게 그거였어……? 완전히 미쳤어……. 경악하면서도 송이는 경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화장터에서 하연이를 보내면서 송이도 다짐했었다. 하연이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럴 수 없는 걸 알기에 신드롬 활동에 매진했는지도 모른다. 하연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죄책감으로.


하지만 경수는 신드롬을 나갔다. 그땐 일에 회의감이 생겨서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었다. 나가서 하연이를 살릴 연구에 몰두한 것이다. 그동안 난 뭘 한 거지? 가슴이 조여들었다. 투병하며 메마른 하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 나 무서워……. 살려줘……. 하연이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정화만 하면 돼.”


송이의 귀에 경수의 말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증후인들은 목숨 결정 구조가 조금 독특해. 그게 죽은 사람 몸에 들어가면 반응을 일으키면서 숨을 불어넣어. 여기에 일반인한테서 추출한 목숨을 주입하면 돼. 사흘간 살아있게 하는 건 성공했어. 근데!”


경수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어.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저 연명할 뿐이었지. 분명 목숨은 붙어 있는데 왜 그런 거지? 어디가 잘못된 거지? 송이야, 네가 필요해. 하연이를 살려야지! 목숨 거래가 합법화되면 안정화 실험에 필요한 목숨의 양은 넘쳐 나. 그러니까 재료는 걱정하지 말고 옛날처럼 즐겁게 실험하자.”


“하연이의 몸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송이가 악을 썼다.


“냉동 보존 중이야.”


경수가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송이는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본 건 뭐였지? 분명 새하얀 관에 염을 한 하연이가 누워 있었다. 그 관은 화구 안으로 들어갔고…….


“하연이의 시체를 빼돌린 다음 방부처리 해서 냉동 보존했어. 이 프로젝트는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아, 다행이다……. 하연이를 살릴 수 있어……. 송이는 안도했다. 연구 자료를 빨리 보고 싶었다. 증후인의 결정 구조는 어떻게 다른 거지? 실험 한 번에 어느 정도의 목숨이 필요하지? 파란 조명 아래 누운 사람들의 팔에 꽂힌 관을 떠올렸다. 한 방울씩 모으는 걸로는 턱도 없었다. 추출 시간을 어떻게 단축하지? 


이것저것 고민하던 송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자각한 것이다. 자신은 추출한 목숨을 다시 주입할 방법을 알아보고자 왔다. 그제야 하나씩 살폈던 증후인들의 송장 같은 얼굴이 눈앞에 흘러갔다.


문득 하연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 오지 말라니까 왜 자꾸 와?’

‘언니, 나 여기에 와야 쉬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오면 인상 찌푸리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 걸 볼 수 있잖아. 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하연이가 그 사람들의 목숨으로 살아난다고? 송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는 하연이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하연이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송이가 비장하게 말을 던졌다. 


“뭐?”


경수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비틀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남의 목숨을 사서 살아난 걸 알면 하연이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그제야 경수가 표정을 풀고 아주 긴 한숨을 내뿜었다. 생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송이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하연이가 너를 얼마나 따랐는데…….”


“알아.”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송이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도 하연이가 보고 싶어. 하연이를 살리고 싶어. 하지만 타인의 불행을 모아 살아나는 거라면 난 할 수 없어. 하물며 그 결정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래……. 그래……. 너마저도 안 된다고 말하는구나.”


경수가 힘없이 뒤돌아섰다. 책상으로 가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창가로 갔다. 유리창 중 하나에 달린 손잡이를 쥐고 바깥으로 열어젖혔다.


경수의 키만 한 유리문이 열렸다. 그러자 문틈으로 바람이 몰아치면서 경수의 파란색 정장이 나부꼈다. 경수가 문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마치 문 열린 새장에서 나가려는 파랑새처럼 보였다.


“이 방을 설계할 때 그러더라. 꼭대기 층에 유리문을 내는 건 절대 안 된대. 이상하지? 사람들은 내가 하려는 건 다 안 된다고 말해.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 돼. 내가 날개를 펴지 못하도록 붙잡으려는 것처럼.”


경수가 창밖에 다리를 내놓고 걸터앉았다. 발밑은 허공이었다. 몸이 조금만 앞으로 쏠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그런 것쯤은 전혀 두렵지 않은 듯 경수는 두 팔을 뒤로해서 상체를 지탱하고, 다리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말했다.


“그런데 내가 밀어붙였어. 돈 좀 쥐여주니까 안 되는 게 없더라고. 난 갑갑할 때마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봐. 하늘을 보면서 생각해. 저 하늘 너머에는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을까? 아프지 않은 하연이도 있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도 있고, 우리 가족이 함께 하하호호 하는 세상이?”


경수가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눈썹을 덮은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송이는 모니터 화면을 다시 봤다. 경찰들은 여전히 28층에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경찰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올라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송이는 경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바람을 맞으며 흥얼거리던 경수가 주머니에서 파란색 물약을 꺼내더니 단숨에 마셨다.


“그건 만들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송이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 경수가 속박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약효가 발휘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경수가 마신 건 그의 능력 물약으로 마시고 눈을 감으면 자신이 꿈꾸는 환상을 보게 해주었다.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이 있어서 송이와 경수는 다시는 생산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경수의 콧노래 소리가 더욱 커졌다. 흥에 겨운지 상체를 양옆으로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경수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밖에서 부는 바람이 좁은 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가 떨어지지 않을까 송이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바람 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다.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송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카펫 위를 살금살금 걸었다. 경수가 앉아 있던 소파를 지났다. 책상 옆을 지났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경수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하늘의 한 점을 응시하던 경수의 몸이 잠에 든 것처럼 스르륵 힘이 풀리더니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고는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송이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손도 뻗지 못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연이가 죽을 때처럼, 그저 바라만 봤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


죄책감이 송곳처럼 송이의 심장을 찔렀다. 스르륵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송이는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연이 안 살릴 거야?’

원망 가득한 경수의 눈이 송이를 노려봤다.

‘언니, 나 무서워…… 근데 왜 안 살려줬어?’

병상에 누운 하연이의 눈이 송이를 노려봤다.


이게 다 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깊은 절망이 송이를 바닥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때였다.


“도와줘요! 누나!”


간절한 외침에 송이는 눈을 떴다. 지후가 바닥에 엎드려 창밖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송이는 무슨 일인지 판단할 새도 없이 달려갔다. 지후가 경수의 양복 목둘레를 움켜쥐고 있었고, 축 늘어진 경수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송이는 경수의 어깻죽지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올렸다.


“하, 다시는 물약을 써서 사람을 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후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살려야겠어. 팀장님도 저처럼 도망치기만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살려야겠어…….”


그러더니 경수를 향해 소리쳤다.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만 꿈꾸는 것도 도피라구요! 도망치지 말고 사세요오오오!”


지후가 괴성을 내지르며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경수의 몸이 천천히 위로 끌어당겨졌다. 송이도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힘을 보탰다.


송이는 끌어 올린 경수를 바닥에 던지고는 그대로 카펫 위에 벌러덩 누웠다. 팔에는 감각이 없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옆에서 성대를 긁는 듯한 지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송이도 숨을 골랐다. 문틈으로 저녁의 선선한 공기가 주룩주룩 흐르는 땀을 식혔다.


“예전에 소리친 거 사과할게요.”


지후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양환영 할아버지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식으로 누나한테 뭐라 했잖아요.”


“그랬나?”


송이는 모르는 척했다.


“살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냥 내버려뒀어요. 근데 후회했어요…….”


지후의 목소리가 꾸중 들은 아이처럼 점점 작아졌다. 송이는 주어가 죄다 빠져 있는 말의 주어를 채워 넣으며 의미를 헤아려 봤다. 뜻을 이해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송이가 물었다.


“물약 몇 병 마셨어?”


“네 병이요……. 첫 병은 팀장님이 추락하고 나서 반사적으로 마셨어요. 근데 그냥 놔뒀어요. 팀장님의 선택이니까……. 아니, 그보다는 살리면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런데 금방 후회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누나가……, 아, 아니에요 이건.”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지후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누나가 너무 슬프게 울었거든요. 엎드려서, 바닥을 치면서.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봐서 그대로 놔둘 수가 없겠더라고요.”


송이는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숨기고 또 물었다.


“나머지 세 병은?”


“두 번이나 구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어요. 네 병째 누나한테 도움을 구한 거예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다행이다…….”


송이가 웅얼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송이는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가을바람이 살랑이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운동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운동을 극찬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몸뿐 아니라 늘 무거웠던 머리까지 맑아진 느낌이었다. 집에 가서 씻고 맥주 한 캔 마시고 푹 자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 같았다.


따르릉 소리에 송이는 몸서리치며 깼다. 그제야 선잠이 든 것을 알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동엽이었다.


“누나, 사람들 탈의실 앞에 모아놨어요.”


아, 애매한 소리를 내며 송이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목숨을 주입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나서 물었다.


“경찰들은 어디에 있어?”


“일부는 딜레마 직원들 연행해서 내려갔고, 일부는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을 VIP층으로 옮겨. 거기에 기구가 다 있을 테니까. 목숨 주머니 반드시 챙기고.”


“VIP층이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없어.”


VIP들이 도망치는 걸 이미 모니터로 확인했다. 송이는 금방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옆을 바라봤다. 지후와 경수가 술에 취한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야, 윤지후! 선배! 진경수!”


소리쳐 깨워봤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곤히 잠든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방해하지 않고 잠시 두기로 했다.


일어나서 사무실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송이가 아는 경수라면 연구 자료를 가까이에 놓았을 게 분명했다. 언제든 찾아볼 수 있고, 언제나 눈에 띄는 곳에. 발걸음을 돌려 경수의 의자에 앉았다. 책상 서랍을 차례대로 열어봤다. 자료는 없었다. 다만 파란색 물약이 두 개 눈에 띄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책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책상은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휑했다. 선반에 놓인 얇은 책을 몇 권 뒤적여 봤지만 사업 개요를 담은 홍보 책자였다. 송이는 마우스를 흔들어 모니터의 화면 보호기를 해제했다. 접속하려 했으나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비밀번호……. 떠오르는 대로 숫자를 몇 개 눌러봤지만 죄다 틀렸다고 나왔다.


경수와 연구했을 때를 되새겨봤다. 경수는 연구 자료를 항상 출력해서 봤다. 모니터로 보면 눈이 아프다면서. 노인네 같은 소리 한다고 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출력한 자료는 잘 정리해서 제본한 다음 책으로 보관해 뒀다. 


책……. 언제든 찾아볼 수 있고…… 언제나 눈에 띄는 곳…….


송이는 의자에 앉아 서재 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는 곳에 가상의 점을 찍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정갈하게 꽂힌 책들의 책등을 손으로 쓸었다. 예상대로 ‘목숨 추출 및 주입에 관한 기술’이 꽂혀 있었다.




전화를 끊은 동엽은 손짓으로 동생들을 불러 모았다. 계약자들을 줄 세우고 있던 승우와 남우, 연지가 궁금한 눈빛을 하고 달려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VIP층으로 옮길 거야. 사람이 많으니까 팀을 나누자. 남우랑 승우는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비상계단으로 가. 연지는 노약자분들을 엘리베이터로 내려보내 주고. 나는 먼저 내려가서 방을 확인해 볼게.”


남우, 승우, 연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엽이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입가에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고 계약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이동하실 건데요, 목숨 주머니 잘 챙기셨죠? 흘리면 여러분들 목숨 날아가는 거예요.”


“어디로 갑니까?”


체크무늬 셔츠로 갈아입은 아저씨가 손을 들고 물었다.


“뺀 목숨 다시 넣으러 VIP층으로 갈 거예요.”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화하는 소리가 동엽의 귀에 얼핏 들렸다.


“어머, 내가 살면서 이모탈 호텔 VIP층을 가보다니.”

“근데 우리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러다 돈 못 받는 거 아냐?”

“못 받으면 큰일인데. 이미 다 썼단 말이야.”


기껏 목숨을 구해놨더니 돈 못 받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송이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나 몰라라 하고 싶었다. 동엽은 인상을 구기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4층에서 내렸다. 복도에 스산한 적막이 흘렀다. 방문이 죄다 스토퍼가 내려진 채 열려 있었다. 동엽은 가장 먼저 보이는 방안을 기웃거렸다.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송이의 말대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른편에 낯익은 구조의 욕실이 보였다. 잘못 순간 이동해서 VIP층에 왔던 악몽이 떠오르면서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동엽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고,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놓인 쿠션은 흐트러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와인이 든 와인잔과 치즈 몇 조각이 남은 우드 플레이트가 놓여 있었다. 직전까지 사람이 있었는데 다급하게 도망친 것 같았다. 자신에게 호통을 쳤던 여자도 혼비백산 도망쳤을 생각을 하니 코웃음이 나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송이였다.


“너 어디야?”

“VIP룸이요.”

“링거대 있어?”


두리번거렸으나 링거대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침실에서 링거대를 발견했다. 링거대에는 주인을 잃은 목숨 주머니와 호스가 달랑거렸다.


“네. 있어요.”

“그 주변을 사진 찍어서 보내줘.”


사진을 찍어서 송이에게 전송했다. 잠시 후에 스피커에서 송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를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약자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목숨을 다시 주입하는 방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VIP룸에 가시면 방 어딘가에 링거대가 있을 겁니다. 거기에 자신의 목숨 주머니를 거세요. 그다음 방 어딘가에 새 바늘이 있을 겁니다. 바늘을 자기 정맥에 꽂고 방 어딘가에 있는 호스를 연결하면 됩니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니 꼭 거기에 있는 걸 사용하세요. 텔레비전으로 바늘 삽입 영상을 송출해 드릴 테니 보고 따라 하세요. 못 하시겠으면 그냥 목숨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송이다운 방송 내용에 동엽은 실소가 터졌다.


“아, 그리고.”


방송이 이어졌다.


“다 맞았으면 집에 가시면 됩니다. 다시는 이런 일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리고 신드롬 직원분들은 로비로 모여 주세요.”




송이와 지후는 동엽과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로비 주위를 살폈다. 호텔 직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는 경찰 몇몇이 눈에 띄었다. 회전문 밖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사이사이에 방송국 마크를 단 차들도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동엽과 아이들이 내렸다. 송이와 지후는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만난 것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누나…….”


동엽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송이에게 다가왔다.


“동엽아, 수고했어.”


송이가 동엽의 등을 토닥였다. 그다음 나머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입구에 기자들하고 유튜버가 쫙 깔렸어. 우리는 지하 주차장 쪽으로 해서 빠져나가자.”


남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유명해질 기회인데? 텔레비전에도 출연하고 유튜브에도 나가고…….”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야.”


송이는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주차장 입구로 걸어 나왔다. 밖은 어느새 어둑한 밤이었다. 송이는 동엽과 아이들을 택시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후와 둘만 남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송이와 지후도 택시를 탔다. 지후가 창밖에 얼굴을 대고 조명이 켜진 이모텔 호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경수 팀장님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30층에 경수만 놓고 온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송이는 연구 자료를 찾고 나서 지후만 깨웠다. 경수는 도저히 깨울 수가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참 편해 보였다.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했다.


“경찰이 알아서 하겠지.”


송이가 심드렁한 척 말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 생각이 간절했다. 오직 그것밖에 필요한 게 없었다. 송이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표지 Image by Clker-Free-Vector-Image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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