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norocitul!(빌어먹을!)”
뎅그랑. 민준의 옆으로 초록색 술병이 날아든다. 아버지는 취하면 루마니어로 욕을 지껄인다.
술에 잔뜩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저 남자가 민준의 아버지다. 4세기째 살고 있지만 뱀파이어 세계에서는 젊은 축에 속한다. 죽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야! 이번에 데리고 온다는 애 이름이 뭐라고?”
아버지가 꼬부라진 혀로 묻는다.
“영이…….”
“뭐? 야, 이 개자식아. 크게 말해! 안 들려!”
“영이에요.”
“성은 뭔데?”
“주영, 주영이에요.”
“외자야?”
“네.”
대답하자마자 민준은 재빨리 “아버지”하고 부른다. 중얼거리며 욕을 내뱉던 아버지가 반쯤 감긴 눈시울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저 밥 좀 먹고 올게요.”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한다.
“참나, 피도 못 먹는 새끼가 뱀파이어라고. 아빠 먹을 때 같이 먹으라니까 말도 아주 개같이 안 들어요.”
주정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민준은 도망치듯 집을 나온다.
***
“민준아, 왔어?”
계산대에 선 지영이 반긴다. ‘지영 해장국’의 지영으로 어머니 가게에서 일을 돕고 있다. 올해 서른네 살이라고 하니 한국식으로 따지면 누나보단 이모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을 가리킬 때 꼬박꼬박 ‘누나’라고 칭해서 민준도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러준다.
“누나, 안녕하세요.”
“오늘도 선지해장국이야? 누나가 다른 것도 줄까?”
지영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묻는다. 그러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다.
“맛있게 먹어라.”
점순 아줌마가 뚝배기를 민준 앞에 놓는다. 이 가게의 주인이자 지영의 엄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지영에게 속삭인다.
“어린애가 입맛이 참 별나다니깐.”
“그니까, 엄마. 귀여워 죽겠어.”
어이, 다 들린다고. 수다스러운 모녀가 껄끄럽지만, 주변에 선짓국을 여기만큼 하는 곳이 없어서 결국 다시 찾게 된다.
민준은 피를 먹지 않는다. 민준만 그런 건 아닌 게 뱀파이어의 인혈 섭취율은 날로 줄어드는 추세다.
요즘 젊은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 소 피, 돼지 피를 마시는 것도 간혹 있는 일. 요새는 육회, 피순대, 선지처럼 조리된 걸 주로 먹는다.
피를 마시면 벽도 탈 수 있는 괴력이 생기겠지만, 인간 사회에서 사는데 그런 능력 따윈 필요치 않다. 더군다나 피를 한 번 마시면 바닷물처럼 계속 마시고 싶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어울려 살기 어려워서 더 인간답게 사는 게 젊은 뱀파이어 사이에서 유행이다. 그 덕분에 피를 마시지 못하는 민준이 튀지 않는다.
“일요일인데 너희 아버지는 뭐 하시니?”
계산대 선반에 턱을 괴고 엉덩이를 쭉 뺀 채 지영이 묻는다. 술 마시는데요.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그녀에게 실망감을 안길 수는 없다. 그랬다간 지영의 호의가 뚝 끊길 테니까.
지영이 점순 아줌마 몰래 선짓국을 하나 더 싸 주거나, 가게 앞을 지나는 민준에게 포장한 순대를 불쑥 내밀어 준 덕분에 종종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면발만 가득한 순대는 비리기만 했지만.
지영은 민준의 아버지를 좋아한다. 이건 민준의 눈썰미로 안 게 아니다. 이 동네에 이사 오고 얼마 안 있어서 민준이 아버지와 함께 지영 해장국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때마침 가게 밖에 나온 지영이 아버지를 보고 감정을 숨기지 못한 탓이다.
노골적인 시선과 한껏 솟은 광대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지영은 민준만 보면 아버지의 소식을 묻는다.
올해 삼백칠십삼 살인 아버지는 민준이 봐도 미남이다. 엄마도 말했었다.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그윽한 눈빛을 보면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고. 와인을 마실 때 붉게 물든 입술은 훔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그랬던 이가 이제는 방구석에 앉아 초록병에 든 소주로 입술을 적시고 있다.
밥을 다 먹고 해장국집을 나오자,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고 이르게 켜진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고 있다.
아, 집에 들어가기 싫다. 지금쯤 곯아떨어졌으려나. 민준은 집 앞을 서성인다.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빌라 입구로 선뜻 발이 향하지 않는다. 결국 발길을 돌려 집 앞 놀이터로 간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네에 앉는다. 바닥을 차 추진력을 얻자 그네가 공중에 붕 뜬다. 점점 속도를 붙여 높이 솟아오른다.
그네가 정점에 올랐을 때, 놀이터 밖에서 키가 다른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온다. 굉장히 익숙한 실루엣이다. 그네가 밑으로 내려오고 다시 한번 솟아올랐을 때 그 정체를 알아챈다. 영이다. 영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어느 빌라로 들어가고 있다.
그네가 올라갈 때마다 그들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린 영이와 눈이 마주친다. 생기 없던 영이의 눈동자가 대번 사나워지더니 갑자기 민준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고 제 갈 길을 간다.
민준은 저울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여긴 영이의 집과는 거리가 좀 있다. 여기에 왜 왔을까?
설마! 민준은 발을 질질 끌면서 그네를 멈춘다. 깨달음 얻은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탄복한다.
집이 또 있나? 에이씨, 나 한 채 주지. 나도 집 나가고 싶다, 시—발. 부러움에 어설프게 욕을 내뱉어 본다.
다음날, 민준은 영이를 힐끔거린다. 언덕을 넘어 윗동네에는 무슨 일로 온 건지 궁금하다. 영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 해맑은 얼굴로 태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로의 어깨를 톡톡 치고 팔을 감싸는 게 꽤 친해진 모양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데 민준에게 보인 살기는 온데간데없다.
“민준아!”
갑자기 영이가 민준을 부른다. 웃는 얼굴로 반갑다는 듯 손까지 흔들면서. 민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영이를 쳐다보며 생각한다.
어제 자기를 봤나? 못 봤나? 혼란스럽다. 아, 너무 걸리적거려서 눈앞에서 없애버리고 싶다. 어서 집으로 초대해야겠다.
영이가 민준의 자리로 걸어온다. 옆에는 태영이 따라오고 있다. 민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괜히 수학 교과서를 뒤적인다.
“민준아, 민준아.”
영이가 빈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는다. 그녀의 팔이 민준의 팔에 살짝 닿는다. 냉랭한 팔에 온기가 느껴지자 민준은 의자를 옆으로 끌어 살짝 거리를 둔다.
“태영이가 너랑 친해지고 싶대. 우리 다음에 같이 놀까? 우리 집에서?”
사근사근한 말투에 민준은 기가 찬다.
와, 이거 뭐야? ‘다신 오지 마! 이 거지새끼야!’ 이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얘는 정신이 나간 건야? 아니면 기억을 잃은 거야?
“태영아!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셔.”
누군가의 부름에 태영이 교실을 나간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영이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그 표정 그대로 민준에게 말한다.
“진짜야. 놀러 와.”
와…… 이렇게 달갑지 않은 초대는 처음이다. 감정이 상한 민준이 비아냥대는 투로 말한다.
“왜? 너 어제는…….”
“엄마가 너 데리고 오래.”
제 말만 하고 영이가 일어선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영이가 이름 모르는 여자애와 인사를 나눈다.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다. 방금 보인 싸늘한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민준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한다. 그래도 영이 엄마가 나를 초대한 건 맞지? 목표물을 변경할까? 그 여자를 데
리고 가면 아버지가 참 좋아할 텐데.
5월에 접어들자 바람마저 후덥지근하다. 살을 태울 듯이 고약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아스팔트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민준은 질식할 것만 같다. 마음 같아선 건물이 그림자로 만들어 놓은 그늘로만 다니고 싶다.
하지만 이 말을 꺼냈다가 영이에게 음침한 새끼라고 욕을 들었다. 영이는 꼭 큰길로만 걷는다. 이 정도 햇볕은 맞서주겠다는 듯 고개를 당당히 쳐들고.
종례가 끝나면 영이는 귀신같이 민준을 찾아내어 집에 같이 가자고 한다. 무슨 목적이 있는가 하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단독주택이 늘어선 언덕 초입에 다다르면 영이는 여지없이 드라마 세트장 같은 집으로 들어간다. 민준에게 들어오라는 말도 건네지 않고.
엄마가 불렀다면서 집에 오라고 한 게 벌써 이 주 전이다. 내심 초대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어서 영이의 엄마와 친분을 쌓아 민준의 집에 데려가고 싶다. 아버지도 조그마해서 피도 별로 없는 주제에 성격만 괴팍한 치와와 같은 영이보다는 엄마 쪽을 선호할 것이다. 둘이 손을 꼭 잡고 집에 와 주면 더욱 좋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영이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민준은 문득 의문이 든다. 자기야 그렇다 쳐도, 이 애는 왜 자꾸 집에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인가? 하는 꼴을 보면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집까지 바래다줄 보디가드가 필요한 걸까? 살짝 자존심이 상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차피 영이를 아버지 방에 던지면 이 짓도 끝날 테니까. 그날을 기다리며 구역질 나는 더위를 참아본다.
“아, 덥다.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손부채질하던 영이가 언덕을 오르지 않고 샛길로 빠진다. 오늘은 너희 집에서 놀자고 말하려던 민준은 당황한 채로 그녀를 따라 편의점으로 향한다.
“넌 뭐 먹을래?”
영이가 가게 앞에 놓인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며 묻는다. 민준도 냉동고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는다. 냉기가 달궈진 얼굴을 식힌다. 극락이 따로 없다. 뱀파이어의 영면 의식처럼 안에 들어가 눈을 붙이고 싶은 정도다.
“골랐어?”
영이가 재촉하듯 묻는다. 민준이 눈에 익은 아이스크림을 집어서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영이에게 들어 보인다.
“쌍쌍바? 취향이 참 노인네 같네.”
툭 말을 내뱉고 영이가 아이스크림을 낚아채더니 계산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민준은 영이의 말을 곱씹어 본다. 노인네 같다니……. 1979년에 쌍쌍바가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다. 단돈 백 원으로 둘이 더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막대기를 잡고 쫙 갈라보면서 우정 테스트니 사랑 테스트니 하는 재미까지 있다. 허세 가득한 외국 이름이 적힌 아이스크림을 먹는 꼬맹이에게 그런 낭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짤랑, 풍경 소리가 울리고 영이가 밖으로 나온다. 민준에게 쌍쌍바를 건네고 자기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푹 뜯는다. 민준도 아이스크림의 껍질 까고 쌍쌍바에 달린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씩 쥔다.
영이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지켜본다. 그러자 이게 뭐라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민준은 양손에 동일한 힘을 주고 막대기를 옆으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이스크림이 ㄱ자 모양으로 쪼개진다. 다른 쪽에는 한 입 거리의 아이스크림만 남아 있다.
“그것도 못 하냐?”
영이가 바로 놀린다. 별것도 아닌 일에 민준은 부끄러움이 차오른다.
“조그만 거 나 줘.”
민준이 막대기 하나를 영이에게 건넨다. 쌍쌍바를 입에 넣으면서 영이가 마치 제 일처럼 말한다.
“담에 또 도전하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걷다 보니 금세 연갈색 저택 앞에 도착한다. 영이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손을 흔든다. 민준도 엉겁결에 따라 손을 흔든다.
철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까지 보고 나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넓고 단정했던 길이 곳곳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들로 인해 좁아진다. 부지런히 걷다가 언덕마루에서 잠시 쉬어간다.
우뚝 서 있는 전봇대 아래에 놓인 쓰레기봉투가 보인다. 버릴 데가 없어서 여태 들고 다닌 쌍쌍바 막대기를 버린다. 그 순간 민준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도 영이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일은, 내일은 반드시 가리라 굳게 다짐한다.
표지 Image by Vicki Hamilton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