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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Sep 11. 2024

연재소설_4화 잠깐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다음날 종례 후에 영이가 다가오더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본래의 말투로 묻는다.


“야, 오늘 시간 있지?”

“왜?”

“어디 좀 가자.”

“어디?”


민준이 물음으로 대꾸하자, 영이가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한다.


“뭘 꼬치꼬치 캐물어? 가자면 그냥 가는 거지.”


민준은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황급히 입을 다물어 숨긴다. 코로 뜨거운 숨을 뿜으면서 영이의 목을 뚫을 것처럼 노려본다. 


오늘은 머리를 말아 올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다. 거기에 입만 갖다 대면 끝장낼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교실 바닥은 피바다가 되고, 교육청이든, 경찰청이든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뱀파이어분께 끌려가겠지. 집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민준은 마음을 다잡는다.


태양이 작열하는 운동장을 걸으면서 민준은 속으로 되뇐다. 잊지 말자. 오늘은 너희 집에서 놀자고 말하는 거다. 꼭 말하는 거다.


영이가 향한 곳은 화장품 가게다. 어디에 가는지 말을 안 하길래 뭐 대단한 곳에 가는 줄 알았다. 차라리 잘 됐다. 마침 민준도 선크림이 떨어졌다.


“야, 나 필요한 것 좀 사고 올 테니까 입구에서 기다려.”


명령을 내리고 영이가 진열대 사이로 사라진다. 민준은 영이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선크림 코너로 향한다. 초록 유니폼를 입고 갈색 앞치마를 맨 점원이 다가온다.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마라, 속으로 빌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얘야, 찾는 제품 있니?”


체념하고 네, 하고 대답한다.


“선크림 찾는 거니?”

“네.”

“평소 바르는 제품 있어?”

“아뇨.”


최대한 무뚝뚝하게 말하는데도 점원은 가지 않고 날파리처럼 귀찮게 군다.


“이제 초여름이니까 이거 괜찮아.”


점원이 주황색 선크림을 건넨다. 훑어보니 40PA+++이다. 낮에도 활동하려면 제일 강력한 게 필요하다.


“SPF 50PA++++ 제품으로 주세요. 톤 업 안 되는 걸로요. 워터프루프 기능은 필요 없어요.”


“어머.”


놀란 점원의 눈이 커진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야, 남자 새끼가 잘도 아네?”


양손에 로션과 붉은색 틴트를 든 영이가 비죽비죽 웃으며 다가온다. 민준이 하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백 년은 더 살았으니까.’


뱀파이어에게 십 년은 인간의 일 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사십 살인 민준의 외양은 중학생인 것이다. 그렇다고 열네 살짜리 애한테 이 새끼 저 새끼 들을 정도로 정신까지 미숙하진 않다. 한국에서 산 것만 해도 칠십 년에 달한다. 


포탄에 맞고 다 쓰러져 가는 누더기가 된 한국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2002년 월드컵도 안 본 이런 애송이한테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지. 정말 골이 아프다.


“야, 선크림 하나 추천해 봐.”


영이가 말한다. 말투가 깡패가 따로 없다. 민준도 퉁명스럽게 군다.


“몰라.”

“왜 빼? 부끄럽냐?”


쑥스러운 게 아니라 귀찮은 거다. 그러면서도 눈으로 진열대를 훑는다. 영이는 여자애니까 톤업이 살짝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야외 활동을 잘 안 하는 것 같으니까 40PA 정도만 돼도 괜찮을 것 같다. 적당한 제품을 찾아 건넨다.


“땡큐. 이거 살 거야?”


물음과 동시에 영이가 민준의 손에서 선크림을 낚아챈다. 민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계산대로 가더니 계산을 해 버린다. 가게를 나오면서 선크림을 다시 민준에게 건넨다.


“떨어지면 말해. 또 사줄게.”

“어, 어. 고마워.”


민준이 손에 든 선크림을 멀뚱히 바라본다.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열네 살 꼬맹이가 사준 물건을 받았다는 자괴감과 저 나이에 돈을 팍팍 쓸 수 있다는 부러움.


“야! 안 와?”


저만치 걸어가던 영이가 홱 뒤돌더니 소리친다.


“애가 왜 이렇게 굼떠? 속 터져 죽겠네.”

“어, 갈게.”


민준이 달려가서 영이의 옆에 선다.


“야.”


영이가 민준을 부른다.


“왜.”

“너희 집은 어디냐?”


불현듯 그네를 타다가 본 영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이도 민준을 본 건지 궁금하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어떤 대답이 나오건 영이를 집에 데리고 가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집은…….”

“아니다. 말하지 마라.”


영이가 갑자기 흥미를 잃은 표정을 짓는다.


‘왜? 대체 왜?’


민준은 조급해진다. 놀러 오지 않을 생각인가? 놀러 와야지. 놀러 와. 너는 놀러 와야 해. 두 눈매에 힘을 주고 최면을 거는 것처럼 영이의 옆얼굴을 지긋이 응시한다. 내 눈을 봐, 영이야……. 


최면이 통했는지 영이가 고개를 돌린다. 민준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윽한 눈동자로 영이를 바라본다.


“뭘 꼬라 봐?”


영이가 팍 인상을 쓴다.


“아, 아니야.”


민준은 고개를 돌린다. 최면은 무슨. 마취총을 쏴도 안 먹힐 것 같다.


길이 점점 경사진다. 민준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집은 진작에 지나쳤는데 영이가 여전히 민준을 따라오고 있다. 말은 저따위로 해도 초대하면 올 것 같다.


“우리 집은 이 언덕 넘으면 나와.”


그 말에 영이가 발을 멈추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몸을 곧추세운다. 말실수한 건가? 민준이 불안한 눈으로 영이를 지켜본다.


“어쩌라고. 안 가. 이 자식아.”

“놀러 와.”

“아, 새끼. 애처럼 구네? 이제 너 혼자 가.”


영이가 뒤돌아선다. 마치 도망치려는 것처럼 발걸음을 분주히 옮긴다.


“꼭이야!”


영이의 등에 대고 소리친다. “안 간다니까!”하고 영이가 되받아친다. 민준은 흐뭇한 미소로 점점 작아지는 영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꼭 와. 이건 진심이야.’


잠깐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영이의 피가 필요하다.    

 

영이를 보내고 언덕 꼭대기에서 오 분쯤 내리막길을 걷는다. 단독주택이 즐비하던 풍경이 오래된 빌라들로 바뀐다. 민준은 산화된 피처럼 검붉은 벽돌로 지은 빌라 앞에서 멈춘다. 


외벽에 딱딱한 금색 글씨로 ‘용추빌라’라고 쓰여있다. 팔십 년대에는 최신식이었겠으나 이제는 낙후된 빌라일 뿐이다.


여기가 민준의 집이다. 인간들은 뱀파이어는 무조건 부자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래를 대비하지 않은 날들은 아무리 쌓여도 부를 축적할 수 없다. 하루하루 연명하기 급급했던 날들을 지나오니 고작 이 꼴이 되었다. 


친척 중에 부자 축에 끼지 않는 민준의 작은아버지도 34평 아파트와 외제차 정도는 소유하고 있다. 월세로 얻은 반지하에 사는 민준네와는 다르다.


민준은 빌라 입구에 달린 고동색 알루미늄 문을 잡았다가 놓는다. 문 너머로 보이는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언제부터인가 저 계단을 내려가는 게 꺼려졌다. 아버지가 알코올에 중독되고부터인가, 민준에게 먹이 사냥을 시킨 뒤부터일까.


민준은 놀이터로 향한다. 해가 지기 전이라 사람이 좀 있다. 구석에 놓인 벤치에 가서 앉자 아이들의 해맑은 고성이 맑은 하늘을 가로지른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 셋은 벤치에 앉아 제 아이를 예의주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어쩔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피난길에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뱀파이어를 마구잡이로 잡아 죽였다. 뱀파이어의 괴력을 두려워한 정부에서 반란의 씨앗을 없애려는 조치였다. 


민준의 가족과 친척들은 무사히 루마니아 국경까지 갔다. 아버지가 미리 부탁해 둔 인간의 위조신분증을 받으러 가는 동안 일행은 잠시 쉬었다. 엄마는 목을 축이겠다며 병에 든 소 피를 마셨다. 


마리엘라 아줌마가 준 것이었다. 마리엘라 아줌마는 민준네가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피를 마시던 엄마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나타나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은 십자가를 꺼내더니 엄마의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함께 있던 친척 중 누구도 손을 쓰지 못했다. 엄마는 잿가루가 되어 버렸다. 


잠시 후에 위조신분증을 받아 온 아버지는 회색 잿가루를 움켜쥐고 오열했다. 한참을 운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에는 송곳니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달려들어 만류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변신했다가 군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즉시 사살될 터였다. 사실 변신한다고 해도 대응할 힘도 없었다. 피를 마시지 못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었다.


민준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엄마들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하나둘 사라진다. 시끄럽던 공원에 적막이 찾아든다. 바람도 불지 않아 그네도 제자리에 멈춰 있다. 쓸쓸히 놓인 놀이기구를 바라보며 민준은 이런 생각을 한다.


시간이 쓸데없이 많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하지만 가치는 쓰는 자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버텨야 하는 것뿐이다. 엄마의 죽음, 술독에 빠진 아버지, 민준의 사냥……. 민준에게는 그저 견뎌야 하는 것일 뿐이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시간을 버텼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지영 해장국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다.


“민준아!”


지영이 가게의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밀고 있다.


“밥 먹었어?”

“아뇨. 아직.”

“그럼 이거 가지고 가서 아버지랑 먹어.”


지영이 봉지 하나를 건넨다. 스티로폼 배달 용기와 플라스틱 용기가 한 개씩 담겨 있다. 선짓국과 순대일 것이다.


“오늘 단체 손님 받았는데 안 나타났잖아. 엄청나게 준비해 놨는데 다 버리게 생겼어.”

“네.”

“민준아.”

“네?”

“무거우면 내가 같이 가져다줄까?”


지영이 눈을 반짝인다.


지금 집에 가면 아마 제힘으로는 걸어 나오지 못할 테다. 아버지가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아뇨. 안 무거워요.”

“아, 그래?”


지영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친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선다. 지영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민준은 낑낑대며 언덕길을 오른다. 플라스틱 용기가 자꾸만 발목을 친다. 잠시 땅바닥에 내려놓고 쉬어간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집에 가서 이것들을 먹을 생각을 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아버지가 집에 없으면 좋겠다. 있더라도 상을 엎지만 않으면 좋겠다.



표지 Image by Vicki Hamilt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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