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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휘 Sep 16. 2024

연재소설_6화 너, 정체가 뭐야?

종례가 끝났다. 민준은 찜찜한 기분으로 교실을 나선다. 성웅과 한결이 휩쓸고 간 여파가 생각보다 크다. 그들이 사람을 모을 수 있을 거란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괜히 이목이 끌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들에게 틈틈이 진행 상황을 물을 수도 있지만 그 일에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 분명 호강 탐정단에 가입하라고 귀찮게 굴 것이다. 그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산을 뒤지고 다니는 멍청한 짓만은 하고 싶지 않다.


“민준아!”


고개를 돌리자 영이가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아차차, 성웅과 한결을 신경 쓰느라 영이를 잊었다. 잠시 멈춰서 기다리자 영이가 옆에 선다. 주위 아이들을 의식한 듯 밝게 웃은 상태로 복화술 하듯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한다.


“오늘 너희 집에 가자.”


지난번과 달리 확신에 찬 어조다. 오늘은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학교 건물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숨을 막는다. 아무리 선크림을 떡칠하고 모자로 가려봐도 태양은 미친 듯이 민준의 살갗을 쪼아댄다. 그런데도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오른다.


오늘, 드디어 아버지에게 먹이를 가져다드린다. 석 달이 걸렸다. 전학 온 첫날 초대를 받은 것에 비하면 오래 걸린 셈이다. 아버지의 인내심도 바닥에 달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삼 주 전에 잠시 외출했었는데, 동물을 잡아 그 피를 섭취하려고 산에 다녀온 것 같다. 현관에 놓인 아버지의 갈색 구두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걸로 봐서는. 체면을 중시하는 뱀파이어가 산에 들어간다는 건 그만큼 피가 당긴다는 뜻이다.


금세 용추빌라에 도착한다. 민준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간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수없이 오르내린 계단이지만 오늘따라 조심스럽다. 뒤에 소중한 먹이가 있는 탓이리라.


야심하게 현관문을 연 민준은 곧바로 당황한다. 늘 현관에 나와 있던 아버지의 갈색 구두가 없다. 신발을 훌렁 벗어 던지고 안방으로 향한다. 아버지가 없다. 재빨리 방을 나와 방문을 닫는다.


뇌가 뚝 작동을 멈춘다.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영이를 잡아두어야 하는지, 다음에 다시 데리고 와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영이는 종잡을 수 없는 아이다. 언제 또 오겠다고 말을 꺼낼지 모른다. 


재빨리 싱크대 위를 눈으로 훑는다. 도마, 스테인리스 냄비, 칼 같은 것들이 보인다. 칼은 안 된다. 아버지가 마실 피를 낭비할 순 없다. 그럼 도마로 내리치면 될까? 그 정도로 기절할까? 기절하면 어디에 묶어 두지? 아버지가 언제 올지도 모른다는 것도 문제다.


걱정이 파도처럼 쏟아지는 사이, 영이가 현관에 들어선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면서 집안을 둘러본다. 신기하다는 듯 현관문에 붙인 방음 스펀지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영이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든다. 사냥꾼으로서의 걱정은 미뤄두고 일단은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서둘러 코를 킁킁대면서 악취가 나지 않는지 확인한다. 반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나지만 다행히도 피 냄새는 나지 않는다.


“야, 어디 앉아?”


영이가 묻는다. 누렇게 바랜 벽지와 옥색 현관문을 배경으로 서 있다. 하굣길에서 매일 보는 영이가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갑자기 영이의 하얀 목선이 확대한 것처럼 크게 보인다. 그러자 감전된 것처럼 꼬리뼈 쪽이 찌릿하더니 그 감각이 등허리를 타고 목덜미까지 이어진다. 민준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파르르 떤다. 집 안이 찜통처럼 더운데도 왜 몸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야! 손님 응대 안 할 거야? 어디 앉냐고!”


영이가 소리친다. 그제야 민준은 영이가 거실 한중간에 멀뚱히 서 있다는 걸 알아챈다. 민준의 집 거실은 말이 거실이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놓인 부엌 겸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일 뿐이다. 손님을 앉힐 만한 공간은 없다.


“어? 어……. 잠깐만.”


민준이 허둥대며 안방 옆에 있는 제 방으로 들어간다. 매트리스 위에 잠옷으로 입는 후줄근한 면티와 검은색 반바지 추리닝이 널브러져 있다. 옷가지를 농 안에 쑤셔 넣고 한가운데에 있는 매트리스를 발로 밀어 구석으로 보내 앉을 공간을 마련한다.


“여기에 와서 앉아.”


민준이 가리킨 자리로 영이가 와서 앉는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화장실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닦지 않아 부예진 거울을 본다. 가슴이 바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왜 이렇게 숨이 차지?’


거울에 고개를 들이밀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두 볼이 벌겋다. 윗입술을 들어 치아를 확인하지만, 두 개의 송곳니는 멀쩡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피가 빨리 도는지 모르겠다.


민준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문설주 너머로 동그랗게 굽은 영이의 등이 보인다. 두 다리를 뻗고 앉은 영이가 팔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민준은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한다. 제 방에 영이가 앉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먹이는 항상 아버지 방에 들어가 있었다.


민준이 방에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영이가 동작을 멈추고 민준을 올려다본다.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묻는다.


“너, 정체가 뭐야?”


영이의 손에는 민준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들려 있고, 허벅지 옆에는 각기 다른 표지의 졸업앨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십 년간 여러 학교를 돌면서 찍은 졸업앨범들이다.


아차! 진작에 버려야 했다. 아니, 목격자를 없애야 한다!


민준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아버지에게는 다른 먹이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영이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간다. 영이는 다시 앨범의 페이지를 넘기는 데 여념이 없다. 지금이다! 민준이 입을 벌린다.


“하, 졸라 신기하네.”


갑자기 영이가 고개를 홱 쳐든다. 그 탓에 민준의 턱이 영이의 머리와 부딪칠 뻔한다.


“내가 전도는 해도 신은 안 믿거든? 이건 믿을 수밖에 없겠다.”


영이가 윗니 아랫니가 전부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다. 아주 즐거워하는 얼굴이다. 처음 보는 모습에 살의가 말끔하게 사라진다.


“야, 앉아봐.”


영이가 바닥을 땅땅 두드린다. 민준이 영이의 옆에 앉자 두 허벅지가 살짝 닿는다. 또 꼬리뼈께가 찌르르 울린다. 민준은 궁둥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 슬쩍 옆으로 이동한다.


“얘 잘 생겼다. 얘 뭐해?”


영이가 가리킨 건 현인이다. 또래에 비해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칠 년 전에도 인기가 많았다. 이제는 성인이 됐겠다.


“너보다 나이 많을걸?”


민준이 대수롭지 않아 하며 말한다.


“대박. 넌 완전 똑같은데?”


영이가 민준의 사진을 가리킨다. 외모가 지금과 똑같은데도 사진에서는 묘하게 세월의 흐름이 느껴져서 왠지 민망하다.


“야, 그래서 넌 왜 안 늙는 거야? 병이야?”


‘그럼 계속 초등학교에 다녔겠냐.’


어이없어하며 민준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뭔데? 뱀파이어 같은 거야?”


헛……! 민준은 멈칫한다. 정체를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와…….”

영이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진다.


“막 피 빨고?”

“응.”

“막 벽 타고?”

“응.”

이번에는 민준이 물을 차례다.

“넌 안 무서워?”

“뭐가?”


영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비죽 내민다.


“내가.”

“왜?”

“뱀파이어잖아.”

“그게 왜 무서워?”

“네 피를 빨아갈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영이가 피식 웃는다. 아주 가소롭다는 듯이.


“피 말리는 것보단 피를 뺏기는 게 낫지.”


백사십 년을 산 민준이건만 그 말뜻이 이해가 잘 안 간다.


보던 앨범을 덮고 영이가 기지개를 켠다. 그제야 민준은 놀라서 시계를 본다. 저녁 여섯 시 반이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창밖을 본다. 창문 앞에 주차된 자동차 옆으로 보랏빛 하늘이 손바닥만큼 보인다. 


좀 더 어두워지면 뱀파이어가 활동하기 좋은 때이다. 그 말은 아버지가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 앨범을 집는 영이에게서 앨범을 빼앗고 집 밖으로 내보낸다. 민준도 운동화를 꺾어 신고 따라 나온다.


“와, 씨, 대박이다.”


언덕길을 오르며 영이가 감탄을 터뜨린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두 볼이 주황빛으로 빛난다.


“니가 뱀파이어라는 거 아냐?”


영이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크다. 민준은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조용히 타이른다.


“좀 조용히 해.”

“뱀파이어 한민준. 이야, 진짜 멋있다.”

“뭐가 멋있어.”


민준은 낯부끄럽다. 좁고 냄새나는 집을 보여주었다는 게.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품위를 자기가 해친 것만 같다. 루마니아에 살 때는 품위 있고 우아한 뱀파이어가 많았다. 그들이 살던 저택에 영이를 데리고 가서 이게 진짜 뱀파이어의 모습이라고 비춰주고 싶다. 지금도 부와 명성을 끌어모은 뱀파이어는 많지만, 그때만큼 격조가 있지는 않다.


영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불쑥 묻는다.


“그럼 넌 몇 살이야?”

“백사십 살.”

“허어…….”


영이가 공기를 들이켜며 놀란 얼굴을 한다. 내 나이를 알았으니 이제 좀 예의를 차리려나? 민준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한 뼘은 작은 영이를 내려다본다.


“졸라 늙었네.”


영이가 혼잣말처럼 말을 내뱉는다. 그다음 골동품을 감정하는 것처럼 민준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본다. 민준은 고개를 움찔거리며 영이의 시선을 피한다. 벌이 윙윙대는 것처럼 신경이 쓰인다.


“씁, 피부가 탱탱한데…….”


영이가 고개를 좌우로 몇 번 젓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준의 양 볼을 주욱 늘려본다.


“뭐 발랐어?”

“선크림.”

“그래서 그런가? 아닌데……. 어떻게 나보다 더 하얗고 곱냐.”


영이가 만두 반죽이라도 쥔 것처럼 민준의 볼을 계속 문지른다. 영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제 그만해라, 하고 저지하고 싶지만 굳이 말로 꺼내기에도 멋쩍다.


“아, 맞다. 선크림 다 썼어?”

영이가 묻는다.


“아니.”

“얼마나 남았어?”

“절반쯤.”

“또 사러 가자. 사줄게.”


민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성에 차지 않는지 영이가 버럭 소리친다.


“야!”

“왜?”

“대답 안 해?”

“그래, 가자.”

“그래.”

영이가 콩콩 뛰면서 앞서간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펄럭인다.


영이가 거대한 철문 안으로 들어간다. 계단을 오르는 영이의 뒷모습을 보자 민준은 긴장이 탁 풀린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반쯤 감긴 눈을 끔뻑이며 언덕을 오른다. 이상하게 몸은 피곤한데 집으로 가는 게 힘들지는 않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아무 걱정 없이 달콤한 잠을 잘 것 같다.


표지 Image by Vicki Hamilt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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