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의 마지막 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이 마지막 날을 장식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잘 마시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신입생 때는 쉽게 얼굴이 발그레 올랐으며, 졸업반이 됐을 때는 향상된 화장 스킬과 (생각해보면 신입생 때는 화장을 안 했던 것 같다.) 틈틈이 화장실로 가서 바르는 분칠로 홍조를 가려 왔다. 또 나름 조절해 마셨고, 지인들에게 술을 그렇게 못 마시는 이미지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친한 얘들은 내가 술찌인 걸 다 안다. 술 찌질이.) 그런 내가 술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맥주를 가장 좋아, 아니 사랑한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나는 휴학을 때렸다. 휴학을 때리고 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인턴과 동아리였다. 동아리는 무려 2개나 들었다. 페스티벌 연합 동아리와 맥주 연합 동아리였다.
그렇다. 나는 놀기 위해 휴학했다.
사람들은 맥주 동아리라고 하면 날라리 모임인 줄 안다. 천만의 말씀. 맥주만을 배우고 익히는 동아리였다.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음.) 지원 절차도 면접만 없었을 뿐이지 서류 전형이 은근히 까다로웠다. 왜 맥주를 좋아하는지 상세하고 진실되게 써야 했으니까.
나는 맥주 연합 동아리의 합격 통지를 받은 후 (매우 기뻤다.) 모임 첫날 연남동에 자리한 수제 맥주집으로 향했다. 맥주 동아리 회장은 우리에게 종이들을 나눠줬다. 그 종이에는 맥주의 종류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대학교 수업처럼 회장은 교수처럼 그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만히 들었다. 당연히 따분했다. 잠시 딴생각으로 빠졌다가 듣는 척을 했다. 지겨워서 내 앞에 놓인 맥주만 마셔댔다. 그러다 맥주를 한 잔 더 시킬까 하다가 분위기가 흥나지 않아 관뒀다. 서서히 사람들의 맥주잔이 비워지기 시작하면서 모임이 막을 내렸다.
맥주 동아리에서는 항상 2차가 없었다. 2차 추진 시 회장을 설득해야만 했다.
멤버들끼리만 몰래 2차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회장 몰래 소주' 모임 (일명 회몰소)을 추진했다.
지금도 동아리 멤버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모여 맥주를 마신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장이 포함돼 있다.
그때 들었던 맥주 수업이 따분했어도, 여러 번의 모임 이후 나는 맥주에 대해 아는 체라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이번 해의 마지막 날을 내가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맥주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첫 번째 맥주집은 작지만 다양한 종류의 수제 맥주를 개발하고 있는 Big aLICe Brewery라는 곳이었다.
테이블이 대형 오크통이었고, 포차에서 볼 법한 등받이 없는 스툴 의자가 앉을 곳이었다. 첫 잔은 내가 좋아하는 IPA.
나는 쓴 맛을 좋아한다. 커피도 신 맛을 좋아한다. 혀를 독특한 방법으로 고문을 주는 맛들을 좋아한다. 쉽게 반복되는 것에 질려해 새로운 맛을 찾다 보니 신맛, 쓴맛을 도전하곤 한다. 여전히.
이 브루어리의 IPA는 과일주스마냥 많이 시큼했다.
두 번째 잔은 IPA 다음으로 물색하던 중 좋아하게 된 스타우트 맥주.
이집 맥주들의 맛은 다 괜찮았는데 아쉬운 점을 꼽자면 맥주잔의 크기가 손바닥만 했다. 가성비가 없었다.
다음 브루어리로 이동하던 중 나는 조금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아까 먹은 IPA의 도수가 좀 세긴 했어"라고 나를 감싸줬다. 두 번째로 온 곳은 Fifth Hammer Brewing Company.
'Beer Is People'이라는, 메뉴판에 적힌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브루어리의 크기보다 컸으며 사람도 많았고, 개도 많았다. 개 친화적인(dog friendly) 맥주집은 생애 처음인 것 같았다. 개들이 먹을 수 있는 맥주는 (개들에게 아쉽게도) 없었다.
주인들이 맥주를 마시는 동안 개들이 조금 심심해 보였지만, 개들은 다른 손님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인이 맥주 마시는 것을 바라보며 맥주의 맛은 무엇일까 상상해보는 개들 사이에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사람이 많아, 단체 테이블 옆 자리에 일행처럼 착석했다.
맥주가 일정 부분 들어간 사람들은 조금 헐렁해지긴 마련이다. 그 허점을 노렸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라고 예의상 물어보고 앉긴 했지만.
잔을 비우고 떠나려던 차, 여자와 남자가 와서 자리에 합석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떠날 참이었으므로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짐을 맡기고 떠났다.
맥주를 주문하러 간 것 같은데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화장실에 간 듯했다.
나는 순간 그들의 일행이 되어 그들의 짐을 지켜 주었다.
맥주를 마시러 온 사람들은 일정 부분 모두가 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것도 개들을 풀어놓고 맥주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라면 더욱 해당되는 얘기였다.
3번째이자 마지막(다시 말하지만, 나는 술찌다.) 브루어리는 외관이 굉장히 아티스티적이었던 Rockaway Brewing Company.
이곳에서 항구 보안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남성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가 뭐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에디터나 작가? 뭔가를 남기는 사람 같은데.."
"오! 맞아요. 리포터. 기자였어요."
이런 식의 통성명을 하다가 그 사람은,
"저는 종종 랩 가사를 쓰기도 해요."
"우와. 멋지네요. 저는 글을 써 책을 내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요. 이 세상에는 책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고 저는 그것도 아니니까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더라도, 그런 부류도 있고 님 같은 부류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모든 시도를 안 하고 배기는 것보다 그냥 해버리는 게 후회도 안 남겠죠."
맥주 2잔째. 이만하면 충분히 소비한 것 같아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욕 수제 맥주 가격은 꽤 비싸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에게 나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문을 열고 나섰다. "저 이만 가볼게요."
그는
"네."
고민하고 있는 내게 이것저것 꾸밈없는 조언을 준 남성 분. 요즘 같은 SNS시대에 SNS 아이디 하나 묻지 않았다.
그 남성 분도 나를 그냥 보냈다. 우리 분명 30분 정도 얘기했는데.
웃기지만, 그냥 알 것 같았다.
우리 모두 맥주에 취해 있었다.
2019년 마지막 날 나는 맥주에 취해 있었다.
혼자서도 꽤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 겨울밤이었다.
서로에게 한 마디의 조언을 건네며 혼자서도 아름다운 밤이라고 여겼던 그런, 한 겨울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