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맥주 따르기 스핀오프
런던 시티 내 은행들이 모여있는 곳에 자리한 펍.
또각또각.
버건디색의 구두를 신고 중성적인 남색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바 앞으로 걸어왔다.
'저 테이블과 같은 일행이에요.'
'네. 탭 넘버 아시나요?'
탭이란, 숫자가 쓰여있는 카드를 가리킨다. 손님의 신용카드와 교환해 보관한다. 보통 2~3개의 테이블(손님 8~10명 이상)일 경우 탭을 만든다. 개인적으로 손님이 너무 많아 정신없을 때 탭을 만드는 편이다. 탭을 만들면, 먹고 튀는 현상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1세기에 먹고 튀는 현상이 있다니.. 아무튼 일종의 deposit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장을 입은 여자의 이름은 사라. 사라는 긴 손톱으로 짙은 갈색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길고 긴 하루였는데 부장이 퇴근 후 부서 전부를 펍으로 불렀다. 비서 에밀리한테 들어보니, 하루 전 미리 예약을 해놓았다고.
'탭 넘버 92. 사라, 뭐 마실 거야?'
동료 에릭이 다가와 탭 넘버를 알려주고 사라의 왼쪽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사라는 그의 손을 살포시 어깨에서 내려놓고 살짝 미소를 보였다.
'진토닉.'
'진, 토, 닉? 그 따분한 걸 왜 마셔? 여기 봐봐. 이렇게 많은 맥주 종류가 있다고. 난 지금 Dead Pony Club이라는 맥주를 마시고 있거덩. 줄여서 DPC. 이름 웃기지 않아?'
에릭이 능글맞게 바에 있는 스탭과 눈을 맞추고 윙크했다.
'이름이 귀여워. 나랑 찰리는 맨날 여기 오면 이것만 마셔. 다른 것도 도전해봐야 하는데 도전적인 것엔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사라는 2주 전에 발표한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이 회사로 이직해오기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였다. 며칠 밤낮을 세우며 PPT를 만들고 준비했다. 자신감도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아이디어가 신선하나 방향성이 획기적이고 현실성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같은날 발표한 에릭의 기획은 평범했으나 실현성이 커 바로 채택됐다.
펍의 중심에 자리한 두 개의 우드 테이블에는 사라의 부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사라는 넓고 둥근 잔에 담긴 진토닉을 받아 들곤 그쪽으로 향했다. 빨대로 잔에 담긴 자몽 슬라이스를 건들며 빈자리를 살펴보지만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사람들은 마시고 떠드느라 사라에게 자리를 내어줄 생각을 못하는 듯했다.
'포크 앤 브리 시키신 분?'
양손 가득 음식 쟁반을 들고 있는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물었다. 그사이 사라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끼어 앉았다. 한 달 전에 막 들어온 인턴 톰이 손을 들었다.
'왜 이제 왔어?'
맞은편에 앉은 동료 제인이 사라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그리고 두어 모금 남은 논알코올 생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그레이징 고트 시키신 분?'
'회의.'
직원이 목이 터져라 물어보는 동안 사라가 속삭였다. 이어 제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고객사에 대한 뒷담이 주였다.
'그레이징 고트 시키신 분? 그레이징 고~~트?'
무표정의 직원이 테이블의 다른 곳으로 이동해 좀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부장이 고개를 들어 손짓했다. 먹음직스러운 피자 한 판이 부장 앞에 놓였다. 부장은 사라가 앉은 쪽으로 곁눈질했다.
'사라 씨, 왔네요. 일은 할만해요?'
'부장님, 맥주 한 잔 더 드실래요?'
부장의 대각선에 앉은 에릭이 대뜸 손을 뻗어 부장의 빈 잔을 잡았다. 그리곤 잔을 직원 앞으로 내밀었다. 음식을 들고 있던 직원은 가고, 다른 직원이 와있었다. 직원은 손바닥만 한 메모지를 꺼내 음료 주문을 빠르게 받아 적어갔다.
부장은 영국식 농담을 섞어가며 일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갔다. 이어 에릭은 프로젝트의 현 진행사항을 브리핑했다.
집에서 쉬고 싶다, 고 생각한 사라는 화장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던 중 제인이 들어왔다.
'프로젝트 얘기 듣기 싫지? 고생했어.'
'아냐. 뭘. 고마워.'
2~3시간째 이어지는 부장의 농담과 에릭의 협력사와의 갈등 및 화해 이야기. 부장과 에릭은 벌써 맥주 4잔째. 사라는 이제 막 두 번째 칵테일 잔을 비웠다. 동료들마저 자리 뜰 생각을 안 한다. 비서 에밀리는 전화를 받고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순간 동료들과 부장은 테이블에 앉지 않고 서있다. 맥주와 와인과 진토닉을 즐기며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면서. 보드카와 럼을 즐기는 이도 있다. 사라도 잠깐 서있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이 닿을 듯 말듯한 높이의 유리잔들을 10잔 이상 쌓아 올려 이동하는 한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아까 음료 주문을 받았던 그 직원이다.
'유리잔이 참 많네. 집에 가고 싶다. 직원도 그렇겠지?'
*영국에도 회식 문화가 있다.
**허구적 인물과 설정을 바탕으로 가상 소설을 지었으나, 일부 현실을 반영했다.
***서빙을 하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 표정을 보면 지루함을 엿볼 수 있다. 이건 만국 공통인 것 같다. 퇴근하면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펍이 아닌, 집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