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낡은 담벼락은 추상화처럼 변해간다. 계절은 색을 덜어내고 여백을 넓힌다. 뚜렷했던 풍경은 점차 단순해지고, 남겨진 흔적들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옷을 벗은 나무와 가지만 남은 담쟁이덩굴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라붙은 잎사귀가 바람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저건 미련일까.
겨울이 깊어지며 나뭇가지가 더욱 두드러진다. 차가운 바람은 살갗을 스치며 나무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겨울의 냉혹함 속에서 날카롭게 드러난 가지는 고요히 저항한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벽에 단단히 붙어 있다.
담쟁이는 이제 헐벗은 몸으로 계절을 견딘다. 바람과 공존하며 버티는 과정에서 더 강해진다. 벽을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은 마치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이는 존재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서 허무를, 또 누군가는 희망을 본다.
한겨울 새벽, 적막한 길에서 담쟁이를 마주한다. 담쟁이는 벽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오체투지 하듯 버틴다. 지난 계절의 푸른빛은 사라졌지만, 그 손길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담쟁이는 그저 버티며 제자리를 지킨다.
삶은 때로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말로 위로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 말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충고를 들을 때마다 차라리 모른 척 내버려두길 바랐다.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은 오히려 깊은 절망을 불러왔다. 차라리 벽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담쟁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게 더 나았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날, 담쟁이 줄기처럼 웅크리고 싶었다.
사람들 앞에서 주저앉고 싶었던 부끄러움이 아직도 선명하다. 긴 시간 동안 움츠리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눈 부신 햇살이 두려워 외면하고, 그늘 속에만 머물렀던 시간. 여유를 얻지 못한 채 깊은 공허를 안고 살아왔다.
나무처럼 단단해지는 과정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담쟁이는 바람을 맞으며 침묵 속에 자신을 맡긴다.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담쟁이의 푸른 꿈은 여전히 멀리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묵묵히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