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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Feb 11. 2024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설 명절이 즐겁다. 예전이면 전을 굽고 조기를 굽고 난리를 피웠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전은 시장에서 몇 가지를 골라서 사고 참돔이나 조기는 어머니의 사정권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다들 잘 먹고 잘사는 시절이니만큼 웬만한 음식이 아니고서는 환영받기가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덕분에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곧 사라지지 싶다. 남편들도 더 이상 어머니나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으니 제대로 명절 기분이 난다. 불과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잘 차린 밥상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얻어먹었는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종일 서서 온갖 음식을 차려내는 일과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우야담』에 전하는 이야기다.

  자고로 부인은 다루기 힘든 존재이다. 남자가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다고 해도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다.

  옛날 한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광막한 벌에 진을 쳤다. 동쪽에는 푸른 기를 서쪽에는 붉은 기를 꼽고는 “처를 두려워하는 자는 붉은 깃발 아래, 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푸른 깃발 아래 서라.”라고 했다. 그러자 10만 병력이 붉은 깃발 아래 섰다. 다만 한 병사만 푸른 깃발 아래 섰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저의 처는 항상 저에게 남자 셋이 모이면 여색을 논하기 마련이니 그런 곳이면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10만이라니요…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아내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을 읽어보면 그 재미가 더 한다. “옛날 한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이끌고”라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 위세가 산천초목도 떨게 할 만큼 세력이 대단한 장군이다. 계백의 황산벌 전투에 나선 백제군이 고작 5천의 결사대였는데 그것의 스무 배가 넘는 10만의 병력이라면 지금으로 치자면 지상군 사령관쯤 되겠다. 그런 그가 아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병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처럼 무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10만 대군에게 양쪽으로 줄을 서라고 했다니 그의 지엄한 한마디가 가을의 서리와도 같았겠다.   

   

  한 명의 병사가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도 결국은 아내를 두려워해서 푸른 깃발 아래 선 것이니 남자들은 모두 아내를 두려워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의 병사의 말이 재미가 있다. “남자 셋이 모이면 여색을 논하기 마련이니”라는 대목이다. 실제로 남자들의 모임 자리에서는 여자 이야기로 대미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사는 이야기, 주식 이야기, 축구 이야기, 경제 문제를 난도질하다가도 마지막엔 꼭 여자 이야기로 끝난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은 차원이 좀 다르다. 옛날에는 예쁜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요즘엔 아내 눈치 보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밤 열 시도 되지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입장이 곤란하다면서 자리를 파한다. 또 다들 집에 가기 전에 아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나 빵을 하나씩 들고 간다.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삼사십 대의 남자들은 없고 소심한 오십 대의 중성들이 서둘러 집을 향하는 모습을 보면, 세월을 이기는 남자들이 없다는 걸 실감한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친구들의 어깨가 더없이 무거워 보인다.      


  전투에 나선 대장군이 아내에 관한 두려움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적은 전혀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집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 전투에서 꼭 이기자고 만들어 낸 이야기지 싶다. 목숨을 건 결전을 앞둔 자리였으니 대장군의 뒷이야기는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라는 지엄한 아내의 명령을 들먹였을 게 뻔하다. 간절한 아내의 말이 여러 목숨을 살렸으니 어찌 아니 들을 손가!      


  사실 이렇게 적고 나니 낯이 뜨겁긴 하다. 수고한 아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뻥을 치시네!”하며 눈을 흘기겠지만, 마음은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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