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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생 Feb 22. 2024

원래 그래!

  

  어떤 모임에 항상 늦게 오는 친구가 있다. 오다 보니 차가 막혔다거나 오려고 하는데 집에 갑자기 큰일이 생겼다는 변명을 한다. 처음에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일 처리도 느릿느릿해서 사람들이 일도 잘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번 그에게 지각하는 일을 좀 바꿔보라고 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나면 좀 일찍 오는가 싶다가도 또 늦는다. 그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원래’여서 ‘그래’라는 별명을 붙여 그를 지칭할 때는 ‘원래 그래’가 되었다. 

  『청성잡기』 제3권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씨(愼氏) 성을 가진 이가 제주목사로 근무하다가 돌아올 때 폭풍을 만났다. 그러자 뱃사공이 임산부는 배에서 꺼리는 대상이라며 신씨의 임신한 첩을 바다에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씨가 꺼리자, 그 첩이 자원했다. 이불을 씌우고 바닷물에 던지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건지려고 하면 바람이 불어서 결국 줄을 끊었다. 허승(許昇)이 정의현감(旌義縣監)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임신한 여종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자, 허승은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명에 달렸는데, 어찌 여종 하나의 목숨이 우리를 구할 것인가.”라며 여종을 살렸다. 배에 탄 사람들도 다 살았다.

  이 이야기는 현감 허승의 판단으로 여종을 구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앞에 나온 신 씨라는 제주목사는 자신이 살기에 급급했고, 뒤에 나온 허승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겼다. 결과적으로 신 씨는 자신은 살 수 있었지만, 첩을 죽였다. 허승의 결단은 여종도 살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을 다 살린다. 한 사람의 판단으로 결국은 사람이 살고 죽는 이야기다. 누구나 허승의 종을 살린 이야기를 보면서 아, 그렇군, 하면서 무릎을 ‘탁’ 칠 것이다. 첩이 죽은 것은 결국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뱃사공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수없이 바다를 오갔던 뱃사공은 바람의 이유를 오로지 임신한 여인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잘못된 판단으로 사람을 죽이고는 그것이 곧 진실인 양 받아들인다. 한 번 그것이 통하자 두 번째도 또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인명을 가볍게 여기며,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늘에다 모든 걸 맡겨버린다. 

   이때의 왕조 실록을 살펴보면 정의 현감 자리를 외직(外職)으로 표현하거나 좌천(左遷)으로 표기한 부분이 나온다. 그러므로 제주목사나 정의 현감 자리는 아마도 왕의 눈 밖에 난 관리들의 자리였음이 틀림없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므로 누구나 꺼리는 자리였을 것이다. 처음에야 바다를 바라보면서 좌천의 아쉬운 마음을 달랬겠지만, 배를 타고 가는 와중에는 살아서 제주 섬에 닿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으며 모르긴 해도 풍랑을 만난 배가 좌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임신부를 바다에 버려 바람을 잠재우는 일이 최고의 방법이라며 ‘원래 그래!’를 남발했지 싶다.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원래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관행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일찍 오냐?”라고 물으면 “아니, 알잖아, 원래 그래!”라는 답이 제일 먼저 나온다. '원래'가 언제쯤이면 시간 약속을 잘 지킬지는 모르지만 시간 약속에 늦지 않고 제시간에 맞춰서 오는 일이 ‘원래 그런 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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