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부츠 한 짝이 망가졌다. 지퍼 부분이 고장 나서 끝까지 올려도 자꾸만 내려온단다. 요즘 그런 수선을 딸아이가 직접 맡기는 일은 우리 집에서는 없다. 아내의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다. 속히 가서 고쳐오란다. 전에 봐둔 수선집이 있어서 종이 가방에 넣고는 찾아갔다. 수선집 사장님은 아무리 좋은 신이라도 짝이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며 이틀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알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서 두 짝을 견주며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양이 여간한 장인의 포스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콩쥐팥쥐전’ 전래동화가 있다. 콩쥐를 낳은 아내가 죽자, 콩쥐의 아버지는 팥쥐 엄마를 만나 결혼한다. 그런데 팥쥐 엄마에게는 팥쥐라는 딸이 있다. 아버지만 없으면 팥쥐 엄마와 팥쥐는 콩쥐를 괴롭힌다. 콩쥐에게는 나무 호미를 주고 팥쥐에게는 쇠 호미를 주어서 밭을 갈게 한다거나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들이다. 그런 콩쥐에게 밭을 가는 일은 하늘에서 소가 내려와서 도와주고, 밑 빠진 독은 두꺼비가 나타나 구멍을 막아준다. 그 후 콩쥐는 친 외삼촌이 초대한 잔치에 가다가 그만 원님 행차에 놀라서 꽃신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원님은 꽃신의 주인인 콩쥐를 찾아서 결혼한다. 그런데 이를 시기한 팥쥐가 콩쥐를 죽이고는 콩쥐 행세를 하는데도 원님은 팥쥐가 콩쥐인 줄 알고 같이 산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서 콩쥐는 환생하고 팥쥐는 죽임을 당한다.
누구나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착하게 살면 좋은 신랑을 만나는 내용은 서양의 고전 ‘신데렐라와도 닮았다. 착한 콩쥐에게는 구원병이 많다. 소도 있고 두꺼비도 있고 외삼촌도 있으며 원님도 있다.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원님은 콩쥐를 자세히 보지 않았는지 팥쥐를 아내로 착각한다. 어떻게 아내를 몰라볼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콩쥐와 팥쥐 모두가 한 남편을 둔다. 남편은 첫 번째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두 번째 아내와 같이 산다. 그렇다면 콩쥐에게도 결혼은 잘못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팥쥐가 콩쥐를 죽인 줄 알지만 철저하게 남편의 잘못은 묻힌다. 이 글을 읽는 우리도 콩쥐와 팥쥐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남편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한 남자가 자매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은 가당치도 않다.
친자매는 아니었으나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팥쥐의 행태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콩쥐와 팥쥐의 집이 부잣집이 아니다. 자매가 같이 밭을 갈아야 하고 장독도 깨진 장독이라니 집안 살림이 형편없다. 팥쥐 엄마는 오로지 남편을 믿고 재혼했는데, 생활은 어렵고 남편은 밖으로만 돌다가 집에 오면 본처의 딸만 이뻐하니 마음이 많이 상했지 싶다. 게다가 어쨌든 전처의 딸이 원님을 만나 결혼했으니 팥쥐 엄마는 자기 친딸도 그렇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모성이 빚어낸 비극이다. 다만 그 모성이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두 사람이 진작에 마음을 고쳐먹고 좋은 신랑감을 찾아 나섰더라면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수선집 사장님은 어느 쪽을 수선했는지 모를 정도로 부츠를 멋지게 수선해 놓았다. 두 짝이 온전하니 한 벌의 멋진 구두가 탄생했다. 안 그래도 출산율이 낮아져서 나라가 우울하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있는 게 보기 좋다. 둘보다 아이가 생겨서 셋이나 넷이 가족을 이루는 것이 더 보기 좋다. 다만 서로 맞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고쳐 살면 된다. 신을 고치는 일보다 마음을 고쳐먹는 일이 백배 천 배는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