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물어 가는 시간에 학교 운동장을 가끔 걷는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이 텅 비어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길고양이도 보이고 까치들도 보인다. 나무에는 매미들도 웽웽 울어댄다. 과연 동물의 세계가 펼쳐진다. 넘어가는 해가 붉게 비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오는데 도무지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 것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동물의 생활 터전이었다.
옛날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까치 소리가 요란해서 나무를 쳐다보니 먹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 까치를 먹으려고 나무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이에 선비는 활을 꺼내 구렁이에게 활시위를 당겼다. 잠시 후, 날이 어두워졌는데 멀리 불빛이 보여 찾아갔더니 예쁜 아낙이 정성껏 선비를 대접해 주었다. 대접을 잘 받은 후에 잠이 설핏 들었는데 숨이 가빠서 눈을 떠 보니 먹구렁이가 선비의 몸을 칭칭 감으며 “너는 내 남편을 죽였다. 처마 위에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다면 너를 죽이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종이 세 번 울렸고, 구렁이는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 나중에 보니 까치 세 마리가 피를 흘리고 죽어있었다.
이 이야기는 까치가 은혜를 갚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이야기다. 사람이 동물을 살려주었더니 동물이 은혜를 갚는다는, 항상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다. 이때 까치는 선한 동물이고 먹구렁이는 악한 동물로 묘사된다. 사람은 늘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도와주어야 하며 불의를 보고 지나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선비가 가던 길을 갔다고 생각해 보자. 까치 새끼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구렁이는 배가 불렀을 것이고 암구렁이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선비의 개입으로 일이 벌어졌다. 암구렁이와 사이좋게 지내던 수구렁이가 죽은 것이 첫 번째 일이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한 집안의 가장이 사라졌다. 두 번째로는 졸지에 새끼 까치는 부모를 잃었다. 세 마리의 까치는 부모가 같은 형제 까치였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세 마리의 까치가 희생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암구렁이는 남편을 잃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암구렁이가 스르르 사라졌다고 하기도 한다.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암구렁이를 가엾게 여긴 어떤 감성적인 이야기꾼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말도 안 된다, 옛이야기를 뭐 이렇게 거창하게 해석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늠할 수 없는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하는 그것뿐만 아니라, 코로나와 같은 역병이 창궐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개입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 하늘을 뒤덮던 그 많던 참새는 다 어디로 갔는지, 금호강에 지천으로 깔려있던 말조개와 참개구리는 다 어떻게 되었는지.
매미 소리가 그냥 우는 소리가 아니라 절규하듯 크게 들려 나무 가까이 갔더니, 사마귀 한 마리가 두 다리로 매미를 꽉 움켜잡고는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선비도 아니고 활도 없어서 그냥 사진만 찍었는데, 남이 먹는 걸 민망하게 쳐다보았나 싶기도 하고, 매미 소리는 또, 잔상처럼 남아 웽웽거리기도 해서 괜히 잠을 설쳤다. 그때 비틀스의 let it be가 환청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