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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짱쓸 Feb 02. 2016

#2.한 남자와 10년동안 연애하기

설레고, 설레고, 또 설레다


"번호가 뭐지?"


그땐 몰랐다. 그때 전해준 번호를 받아간 남자가 10년 후 나와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키도 크고 얼굴도 작고 잘생겼다. 웃을 때 생기는 눈주름이 매력적이다. 나보다 오빠지만 애같은 구석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간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커피숍 사장에게 반말을 한다. 꽤나 친해보인다. 알고보니 군대 동기로 거기서 일을 도와준단다. 이야기를 조금 나눴고 집에 돌아왔다. 썩 괜찮았기에 내 번호도 줬다. 스물한살인 당시 번호를 준다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고시원에서 살던 나는 한살 아래인 남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조금 넓은 방으로 옮겼다. 남동생과 함께 조금은 덜 심심한 스물한살은 보내고 있었지만, 6개월 후 남동생은 곧바로 군대에 갔다.


또 다시 혼자 남겨진 그때. 카카오톡이 없었던 당시 우리의 낙은 미니홈피와 네이트온뿐이었다. 번호를 건내받은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네이트온을 통해 대화했고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귀엽다는 말을 자주했다.  장난끼가 많았고 놀리기를 좋아했다. 진중하지 못한 남자는 딱 질색이었는데(질색이란 표현도 그가 농담처럼 자주 쓰던 말이다) 그 장난끼는 싫지 않았다.


학교 강의가 끝나고 집에 오면 노트북으로 네이트온을 먼저 켰다.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언제나 네이트온 접속이 돼 있다.


1초, 2초, 3초.. 띵동. "수업 끝났나보네" (네이트온은 친구가 접속하면 안내창이 뜬다) 언제든 내가 들어오면 대화를 걸어준다. 가끔 먼저 걸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땐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엄청난데도 참고 또 참고 기다린다. 내가 이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메신저를 접속했다는 사실은 절대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당시엔 '밀당'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밀당은 있었다. "밥은 먹었어?" "뭐먹었어?" "바빴어요?" 등의 평범한 대화였지만 마냥 좋았다. 잠시 손님이 와서 대화가 끊긴 시간은 1분이 마치 1년같이 느껴졌다.


우린 그렇게 평범하게 알아갔고, 평범하게 친해졌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일을 하던 그는 밤늦게 퇴근했기 때문에 만나기가 쉽진 않았다. 우린 그냥 그렇게 매일 대화했다. 사소한 이야기에도 웃었고, 보이지 않아도 조금씩 맞춰나갔다.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켰다.


우리의 대화에는 직설적인, 좋아한다는 표현조차 없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에도 기분이 좋았다라고 기억되는 건, 당시 난 그사람을 이미 좋아하고 있었구나. 라고 해석해준다. 한참 후에 확인했던 사실이지만 그 역시도 매일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네이트온을 켜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설렘이 커져 사랑으로 이어갈 때쯤, 누구에게나 고비는 찾아온다. 다른 여자가 좋다고 떠나갔던 전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 날 불렀다. 내가 계속 생각이 나서 견딜수 없었단다. 됐으니 꺼지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 직접 나갔다. 술에 취한 전 남자친구는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지랄하네"라고 말하며 시원하게 나오고 싶었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드라마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눈물을 보이는 전 남자친구가 불쌍해 보였고, 사과 한마디가 진실돼 보였으며 거기에 대고 시원하게 욕을 해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병신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나도 미안해"라고 해버렸다. 다시 만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못된 기억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던 내 쓸데없는 욕심이었다. (이 때문인지 이후에도 종종 술에 취한 전화가 걸려왔다)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려던 중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그 남자다. 매일 메신저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마냥 편하게 이야기하고 즐겁게 해줬던 사람의 첫 전화다.


"여보세요."

"응, 나야. 무슨 일 있어?"

"아뇨, 왜요?"

"아, 하루종일 접속 안 하길래."

"아.. 지금 잠깐 밖에 나와있어요. 다시 할게요."


걱정했나보다 이 사람이. 매일 했던 온라인상의 대화가 처음 끊긴 날이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다렸나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냥 솔직해지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서 노트북을 켜고(당시에도 편하게 전화할 용기는 없었다) 내 이야기를 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바람난 남자는 나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라고 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물어봤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처가 다 아물진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났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다. 그는 그렇게 날 위로했고, 날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평소와 같이 장난섞인 말투로 나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복잡했던 내 감정은 어느새 사라졌고, 난 그와의 첫 통화에, 첫 위로에,


설레고 설레고,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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