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독특한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흔히 한국인이라면 거치게 되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어쩔 때는 그의 삶이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어쩔 때는 한없이 생생해 보인다. 그 친구의 입장에서 나는 타인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그의 세계와 그 친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는 굉장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느낀 바는 나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작은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관습에 얽매인 삶이 싫었다. 마침 나의 나이가 젊은 편에 속했고 새로운 시도 끝에 실패하더라도 일어설 수 있는 체력과 미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분야에 집중하거나 특정 회사에 들어가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끈기가 부족했었는지 이십 대 후반까지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열정과 새로운 도전을 향했던 나의 마음이 안정성의 측면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듯이 안정성을 바라는 마음에 직장을 다녀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공허함이 생겼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나름 연애도 하고 있었고, 미래에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염두 했기 때문에 사회적 안정성을 얻기 위해 버텼다. 아마도 내가 결혼을 하고, 거기다가 자녀까지 있었다면 계속해서 일을 했을 것이다. 사람의 삶에 정답은 없지만 내가 가정을 우선시했다면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닌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후자의 삶이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의 연애의 끝은 결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 그래서 나의 삶이 망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인생의 거대한 두 기둥이 무너진 채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친구가 대뜸 “형 이제 좀 생생함이 느껴지네요. 살아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편의상 친구라고 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아이러니했다. 나는 내 인생이 망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생생함이 느껴진다니..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흔히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으로 말을 하기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일반적인 관습이나 기준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적 관습에 맞추어진 내가 죽어가는 삶이었고, 관습에서 벗어난 지금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나에게 큰 공감을 불러오지 못했기에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이 말이 다시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나의 존재를 꿰뚫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막연하게 그 친구가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나의 삶도 그 친구와 동일한 관점에서 보고 말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관점을 넘어서 나의 존재적 관점에서 나를 바라본 것 같았다.
다시 돌아보니 한동안 나의 삶이 내 삶이 아니었다. 삶의 방향성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는 집착은 오히려 삶의 기준을 확인하게 만들었고, 이 집착은 나의 삶을 목적과 방향성이라는 한계에 가두어 마치 타인을 위한 삶, 타인에게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관습에 맞추어진 삶은 그 영역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보니 참 친구가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그 친구는 그냥 느낌이라 말하지만 그 느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친구의 말대로 죽은 삶을 살다 보니 나의 느낌적 측면도 많이 죽었던 것 같다. 죽은 삶은 공허함을 부르고, 의미마저 숨어버렸다. 그래서 더욱더 바쁘게 갓생이라고 여겨지는 삶을 좇았던 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침 요즘 관습적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관습적 삶에서 돈을 버는 행위는 나의 존재적 측면에 눈을 감은 채 버티는 인내와 끈기이다. 관습적 삶은 열정의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창의적일 필요도 없고, 밤새 괴로워하며 고뇌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참 쉬운 삶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공허함이 뒤따른다. 나는 관성적으로 다시 편안한 관습적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뒤통수를 한대 맞은 느낌이다.
삶이 꼭 성공적일 필요는 없다. 돈이 많은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적당한 성취와 돈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일단은 먹고살고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친구의 말이 적절한 균형을 찾으라는 말로 들린다. 나만 생각하고 나의 존재 물음에 한없이 빠지다 보면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내면을 향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내면을 무시한 채로 오직 성공과 부를 위해서만이 달려가는 것은 나의 내면의 죽음과도 같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 부자와 거지, 삶과 죽음, 사회적 기준과 내적 기준 모두 이분법적인 언어의 한계에서 온다. 이러한 대립적 구조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는 것이고, 거지이고 싶지 않아 성공을 좇게 한다. 하지만 삶의 경험을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하나의 경험으로 본다면 어떨까? 사회적 기준과 나의 내적 기준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를 구분하고 대립시켜 버리면 둘 중 하나는 나쁜 것 혹은 정답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구분과 대립을 없애면 정답과 오답 또한 사라진다. 그저 온전한 하나의 경험이 된다.
내가 친구의 말을 처음에 사회적 관습 차원에서 이해한 것은 내가 사회적 관습과 내적 기준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언어 자체가 이분법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표현에 어려움이 있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사회적 기준과 내적 기준 모두를 품을 수 있어야 하는 그릇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이처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느낌적인 것, 직관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된다. 그리고 나에게 느껴진 생생함은 어느 한 측면의 경험에 몰두해 있다가 빠져나와 적절한 균형의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느껴진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삶이 항상 생생하거나 즐거울 수만은 없다. 공허함 또한 삶의 하나의 맥락이자 연속이다. 공허함에서 벗어나 생생함만을 추구하는 것 또한 이분법의 구조 안에서 다른 삶을 배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허함을 경험하기 때문에 다른 측면을 고려할 수 있고 양 측면이 존재함으로써 균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