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망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망했다는 것 역시 나를 가두는 것 같다. 망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진 않는다. 오히려 더 굳건해진 느낌이다. 너무나도 슬프고 암울해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구원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 더 좌절감이 들었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요즘 나를 이토록 공허하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 평균에서 벗어나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이었다. 그중 평생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한 무미건조함, 마지막으로 이젠 마음속 희망만으로는 삶이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의 자각이다.
평생 혼자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거리감과 더불어 지나가버린 세월의 야속함 속에서 오는 쓸쓸함이다. 평균이라 불리는 직장에서 나와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이 오랜 인연과의 이별을 불러왔고 이는 내가 평균에서 벗어난 사실과도 같다. 사회적 성실, 책임, 의무에서 벗어나 위태로운 삶을 그리는 내가 더 이상 안정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은 소외감을 불러온다. 모두가 다들 당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사회적 과업이 나의 목을 옥죄여왔다. 처음까지만 하더라도 나만의 날개를 달고 희망을 향해 날아가자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그 믿음이 오만함은 아닐까 나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돌려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는 내가 위로를 준다. 하지만 그 희망이 더 이상 희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너무나도 지독히 차가운 현실이 나를 너무나도 괴롭게 한다. 이런 현실은 내게 살아야 할 의미를 묻는단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하실 테니, 불효를 하기 싫어서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부모님이 모두 떠난 어느 날, 나 또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진 않을까 하는 두려운 확신으로 다가온다. 난 죽음보다 불효가 두려운 걸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책임감 같다. 가정에 대한 책임, 맡은 일에 대한 책임, 자식들에 대한 책임, 그 책임이 지금은 노쇠하신 부모님인 것 같다. 자식의 도리는 하고 싶다는 책임.
가끔 생각에 잠길 때 부모님이 모두 떠나신다면, 마지막으로 세상을 돌아보고 어떤 마무리를 할지 상상하곤 한다. 내가 가진 건 많이 없기 때문에 수월할 것 같다는 농담을 내게 던진다. 이런 상상 후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그래도 그전까지의 삶은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현실이다.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 다른 존재의 물음이 다가온다. 이 물음 속에서는 희망보다는 건조한 현실 속에서 하나하나 떠올려보려 한다. 아마 존재에 대한 물음은 끝나지 않겠지, 하지만 방대하던 혼란이 내 죽음을 스스로 정해두자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다.
죽음을 직면한다는 태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사유가 삶의 두려움을 잠시나마 앗아갔다. 대인관계, 사회적 시선, 취업, 아르바이트 생활 등이 정말 별 볼 일 없이 느껴진다. 특히 어차피 아무도 나를 공감할 수 없을 거라는 차가운 벽이 소외감을 얼려버렸다. 쓸쓸함은 변하지 않지만, 애초에 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쓸쓸했던 건 아닐까 쓸쓸함이 평균값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쓸쓸하지 않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오히려 그런 물음들 보다는 죽음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가 더 궁금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두렵던 죽음이 지금은 가장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