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다치며 일상생활에서의 휴가를 얻었다. 어느새 나의 삶은 정해진 규칙들이 생겨났고, 난 그 규칙에 따라 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서는 알바를 했고, 알바가 끝난 후엔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곤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한숨 자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자기 전까지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본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의 공허함과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삶이 또 다른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었다. 공허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나름 상당히 만족하는 삶이었다. 자격증 공부와 생계를 위한 알바를 제외하고는 전부 내가 원하는 행위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돈이 별로 없어 생활의 제약이 많았다. 그런 제약을 뺀다면 굳이 휴가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고 나름의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상의 규칙이 무너지니 규칙 없는 삶이 주는 것들도 있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펜을 잡을 수 없어 공부를 하지 않았고, 회복에 집중한다는 목적으로 낮잠을 원 없이 잤다. 알바를 가지 않아도 되기에 밤이 깊어감에 따라 잠이 들어야 한다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웠다. 일상의 규칙은 삶이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만 그 안정감은 결국 속박감을 동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소한 속박감으로부터 벗어나니 마음이 너무나도 평온하다. 그동안의 삶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이 사소한 변화가 일상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느낌이 참 신기하다. 잠에 빠지기 직전에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되고, 잠에서 깨 해야 할 일을 정해두고 남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휴가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난 책을 읽을 때 습관이 하나 있다. 하루에도 하고 싶은, 해야 할 일을 두 가지 이상으로 정해두다 보니, 독서가 가능한 시간을 계산한다. 어찌 보면 효율적일 수 있지만, 시간을 정해두는 것은 그 독서가 가능한 시간의 끝이 다가올수록 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휴가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은 끝을 정해두지 않았기에 읽는 것이 지루해지거나,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하루키를 읽었다. 그리고 이 지루함의 끝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직장인에서 벗어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에겐 효율을 추구하는 모습이 남아있나 보다. 그리고 그 효율이 나의 온전한 자유로움을 방해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온전한 자유로움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부상 회복이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유로움이 풍족한 여유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혼자서 보내는 휴가였기 때문이다. 평일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고, 지금 난 부상으로 술도 마시지 못한다. 따라서 아침부터 다시 잠에 들 때까지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이 자유로움이 여유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생활을 장기간 지속한다면 난 분명히 큰 외로움에 빠질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혼자 시간을 보낸다고 말하면서도 하루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관계하고 있고, 간간이 울리는 카톡에 답장을 하고, 유튜브를 통해 나오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만 없을 뿐 난 여전히 관계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뿐이다.
아무튼, 부상으로 인해 운동도 하지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해 조금은 낙담했었는데, 오늘은 참 평온한 하루로 다가와 신기할 따름이다. 하루 종일 읽은 책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동안 이토록 잠이 자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일 예정된 약속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덜 타서 혼자를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삶은 시계추 같다고도 느껴졌다.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상반된 측면을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같은 삶. 그것은 혼란일 수도 있지만 혼란 때문에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양파를 썰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경험이 여유를 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어쩌면 고통은 그간 들여다볼 수도 없었던, 알아차리지 못했던 측면을 비추는 빛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