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무의미 사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의미함에 빠지는 순간들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유독 무의미함에 잘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부류의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무의미에 빠져 있다 보면, 더 깊은 곳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의미의 시작은 또 다른 무의미를 불러오고, 이 끝없는 무의미는 도무지 바닥을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끝없는 무의미의 추락은 매번 되뇌던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의 문장 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힘껏 쌓아 올린 의미가 무너질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자칫 이 문장은 내게 “아직 더 무너져야 한다”라는 폭력과도 같았다. 무의미의 두려움은 그 누구도, 심지어 무의미함에 한없이 빠져있는 본인조차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무한처럼 느껴졌다. 그 무한과도 같은 무의미함의 집어삼킴은 중독과도 같아 삶에서 더 이상 무엇도 갈망하지 않게 만든다.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무의미의 끝에 의미가 찾아온다는 말에 기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섰던 것이다. 무한과도 같은 무의미의 두려움에, 아니 무의미가 안겨주는 안락한 온기에 어쩌면 난 열망을 잃어버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무의미가 무한과도 같았던 이유는 내가 스스로 계속해서 무의미의 (무)의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의미를 갈구한다 말하면서도, 아무런 선택도, 책임도 지지 않는 무의미가 너무나도 안락했다.
선택이 두려웠던 것일까,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기 싫었던 것일까. 무의미는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 달콤한 녀석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무’의 세계에도,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세계에도 정말로 사소한 생명이 계속해서 피어나고 있으며, 어둠은 다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암흑 속에 길을 잃었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어둠을 악으로 규정해 버린다. 어둠 또한 빛만큼이나 찬란하게 존재하는 생명들이었다.
그 미세한 어둠의 떨림들 속에서, 유난히 나를 봐달라고, 나와 눈을 맞추고, 나의 말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떨림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선 어둠 또한 무한과도 같다. 무한과도 같은 서로 다른 떨림들 속에서 오랜 시간 갈구해 왔던 박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알고, 느끼고, 함께하고 있던 박동에 시선이 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선 무의미 또한 의미와 같다고 느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미와 의미의 드넓은 지평선 사이 끊임없는 선택의 여정은 아닐까.
요즘 유독 길가의 피어난 민들레에 시선이 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타고 자리 잡은 대지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생명을 피워낸다. 민들레에게 자의식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은 새로운 생명의 징조이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질 거대한 두려움과도 같을 것이다. 민들레는 스스로 뿌리내릴 대지를 선택할 수 없다. 비옥한 토양부터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콘크리트에서도 뿌리를 내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킨다. 자신의 탄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은 곧 무의미와도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민들레는 탄생의 조건과도 같은 무의미함에도 굳건히 자신의 존재를 피워낸다. 어쩌면 이들에게 무의미와 의미의 구분 따위는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