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고 온 뒤로 소화는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준희 팀장에게 맡기고 일찍 귀가했다. 소화는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눕다시피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민아와 수호씨에게 엄마와의 관계를 말하고 난 다음부터 바쁜 중에도 자주 엄마가 생각이 났었다. 그렇다고 엄마를 만나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던 소화였다. 그런데 낮에 생각지 않게 엄마가 찾아와서 과수원이 팔려서 구미로 이사 가는 것과 오빠 사업자금을 대 달라고 했던 것이 소화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엄마는 오빠 일로 인하여 전전긍긍했다. 엄마와 아빠가 힘없는 노인이 되더라도 어른이 된 오빠한테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전부를 내어줄 것이다. 그것이 오빠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노인이 된 부모가 자신한테 모든 것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넙죽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와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화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소화는 두통이 가라앉지 않아서 약을 먹으려고 소파에서 일어나서 앉았다. 거실 창을 통해서 하늘과 한강이 온통 붉게 타들어 가는 저녁노을이 소화의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옛날 과수원 비탈진 곳에 있던 ‘난쟁이들의 사과나무’에서 바라봤던 노을과 같다면서 소화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바깥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순간 주위를 둘러본 소화는 거실도 깜깜한 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집에 들어왔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화는 유독 캄캄한 것을 싫어해서 환하게 전등을 켜곤 했는데 캄캄한 어둠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어둠에 묻혀서 그대로 더 있었다. 주위는 온통 깜깜한 것과 대조적으로 소화의 머릿속은 오히려 환해졌다. 그리고 복잡했던 마음이 가볍게 정리되자 머리가 아픈 것도 가라앉았다. 이젠 정말 가족과도 온전히 독립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소화는 알아차렸다. 몸은 독립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도 마음만은 불편하게 예산집에 두고 왔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소화는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고향 집으로부터 데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된 소화의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소화가 안내해 주는 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화가 있는 곳으로 마음이 온전히 온 것을 알게 되자 소화는 거실의 전등을 켰다. 그리고 소화는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상대방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소화씨 아니에요?”
“제가 누군지 금방 아시네요.”
“당연하죠. 제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소화씨 전화인데요.”
“내일 시간 되세요? 미용실이 쉬는 날이거든요.”
“당연히 되고 말고요. 제가 10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소화는 통화가 끝나자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옷을 하나씩 벗을 때마다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 같아서 가벼워졌다. 드디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이브가 되자 소화는 홀가분해졌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존재하는 순수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11월의 쌀쌀함과 마음의 상처를 따뜻한 온수로 씻겨 내고자 소화는 온수를 틀어 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 따뜻한 온수는 소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적셔주면서 위로해 주었다. 소화는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의 만남을 통해서 수호씨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소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호씨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호씨의 사랑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금 집에 두고 온 소화의 마음을 온전히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이젠 완전히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집과 엄마로부터 독립했기 때문이다. 소화는 샤워기를 더 세게 틀어 놓고 온몸으로 물을 맞았다. 물은 소화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흘러내려가면서 위로해 주었다.
샤워 후 소화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서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찬 맥주가 소화의 입과 식도와 위를 통해서 내려갈 때마다 소화의 마음도 시원하게 뻥 뚫렸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을 느낀 소화는 마시던 맥주를 식탁에 내려놓고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소화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술은 마실수록 쓰게 느껴져서 속에서 거부하기 때문이다. 소화는 푹신푹신한 쿠션을 등에 대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소화의 술버릇은 알코올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그대로 잠을 자는 것이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곧이어 소화는 소파에 쓰러져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소화는 또 혼자 방에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방이라는 생각에 소화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방 안에는 화려한 화장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금장색으로 칠해져 있는 화장대는 크고 아주 화려했다. 소화는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의자도 화장대만큼 화려했다. 소화는 천천히 그 의자에 가서 앉아 보았다. 의자는 생각보다도 더 편안하고 아늑했다. 의자가 맘에 든 소화는 천천히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또 다른 소화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화는 거울 속의 소화를 보고 웃어주었다. 그랬더니 거울 속의 소화도 따라 웃어주었다. 곧이어 둘은 서로 마주 보면서 함께 웃었다. 그러면서 주문을 함께 외웠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