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어른이 되는 걸까
아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모임이 있었다. 그때 들은 말이다.
"야, 자기는 시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할 것 같아!"
"호호호. 그런가?"
"그럼! 어떤 아들인데! 며느리한테 아들 뺏기는 거잖아!"
"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그 집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 까르르르!" 그 소리에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도 들었다.
"자기는 결혼식에서 엄청 울 것 같아!"
"그래그래. 얘는 엄청 운다! 에 한 표!"
그러다가 나중에는 '얘는 (반드시) 운다'에 만원씩 걸기도 했다. '아니, 내 아들 결혼식에서 내가 울고 안 울고는 내 자유인데, 니들이 왜 돈을 걸어?!' 하면서 웃었지만, 그 말에 내가 정말 울 것 같아서 걱정도 됐다. 하지만 걱정의 내용은 좀 달랐다. 친구들은 내가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에 슬퍼서? 아까워서? 운다고 돈을 걸었지만 나는 내가 혹여 눈물을 찔끔거리다가 비싸게 붙인 인조 속눈썹이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얼마 전 며느리가 될 장민이가 말해줬는데 혼주 화장을 아주 비싼 걸로 예약했다고 말해 줬기 때문이다.
내가 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들이 성장하면서 겪어야 할 일을 먼저 겪어봤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4남매 중 장녀로서 홀어머니와 함께 동생 셋과 살다 보니 남동생들이 군대를 갈 때나 대학교를 들어가고 졸업을 할 때도 언제나 함께 했다. 심지어 장가를 갈 때조차 집안 대소사 모두 항상 선두에서 지휘를 하며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들이 앞으로 겪을 일을 이미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바로 아래 큰 남동생은 다른 동생들보다 더 각별한 마음으로 돌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동생이지만 아들처럼 살피며 살아왔다.
내가 큰 남동생을 특별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동병상련과 측은지심이다. 내가 고3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중학교 2학년이던 남동생이 의젓하게 상주 노릇을 했다. 나머지 두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었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문객들이 많이 왔을 때도 서로 웃고 떠들거나 싸우기도 하는 그런 천진난만한 행동을 했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면서 더욱 슬피 울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나와 남동생은 조금 빠르게 어른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장녀와 장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서 무슨 일을 시켜도 '니는 장녀니까!', '니는 장남이니까!'가 먼저 붙었다. 성질머리가 '욱' 하는 나는 가끔 엄마한테 대들기라도 했지만, 큰 남동생은 공부도 1등이고 전교회장만 도맡아 하는 모범생 그 자체였는데도 좀 힘든 일을 시켜도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고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어떤 때는 그 모습이 더 속상해서 내가 대신 엄마에게 대들었다가 욕을 두 배로 얻어먹기도 했다.
엄마는 나와 남동생에게 '무엇을 하든 동생보다 잘해야 본이 된다고 했고, 무엇을 하려고 하면 동생과 같이 하라고 했고, 무엇이 생기면 동생한테 양보 먼저 하라!'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장녀, 장남으로 자란 큰 남동생을 보면 나는 늘 마음 아팠다. 그러다가 30년 전, 큰 남동생이 군대를 갔을 때도 남해에서 논산까지 운전해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서 갔다. 훈련소 천막 안, 내가 갖고 간 음식을 가스버너에 냄비와 프라이팬을 올리고 제육볶음과 불고기를 볶으면서 내 등에는 애를 둘러업고 동생을 기다렸다. 수 백 명이 있어도 동생은 한눈에 들어왔다. 삐쩍 말라서 키만 큰 애, 걔가 내 동생이었다. 그때 동생을 보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이후, 동생이 복학을 하고 생애 첫 연애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와서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누나야,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여자친구를 조금만 만나볼까 싶다..."
"그럼 그럼, 야! 남자가 연애도 해 봐야지! 그래야 장가도 갈 거 아니가!"
그렇게 연애하는 동생이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어도 용돈이 없어서 데이트비용이 부족할 게 뻔했기에 만날 때마다 내가 여유가 없어도 2, 30만 원씩 동생 손이나 호주머니에 찔러주곤 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당시 동생들을 위해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엄마에게 동생 성격상 연애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꺼낼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다. 더구나 엄마에게 연애한다며 용돈을 더 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동생 신혼집 전세자금이 부족하다며 부탁할 때도 나는 주저 없이 수 천만 원도 아깝지 않게 도왔다.(동생이 갚았다)
그만큼 나는 남동생이 나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그 힘든 상황을 함께 겪어 준 아픈 마음으로 늘 고맙게 생각하며 무엇이든지 도와주려고 애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올케에게 작은 명품가방을 하나 사 주었을 때,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바보야? 왜 저렇게 어머니한테 못하는 올케한테 한 마디도 못하는 거야?"
"당신이 바보구나!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내가 말하면 내 동생만 힘들어지니까!"
"자기야, 시어머니 되니까 어때?"
"아직 딱히 실감이 안 나!"
"시어머니 노릇도 힘들지?"
"어, 나도 나름 노력해야 하니까 쉽지는 않지!"
아들이 결혼한 지 두세 달이 지나니 이제는 '시어머니 행세는 어떻게 하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나는 아주 명쾌하고도 짧게 답한다.
"괜찮아, 나는 우리 엄마 반대로만 하면 돼!"
그렇다. 나는 오래전부터 엄마가 한 것, 그 반대로만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동생들이 결혼하면서 엄마가 시어머니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결혼한 아들이나 며느리를 어떻게 대하는 지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엄마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배웠다. 엄마를 통해서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서 시어머니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을 깨달은 것이다.
우선, 엄마는 아들하고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는 생신이나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여 있는데도 큰아들을 따로 찾는다. 그리고는 안방에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대화를 나눈다. 나중에 무슨 이야기냐고 따로 물어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닌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며느리에게 개방을 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나도 한 집의 며느리로서, 몇 번이나 조용한 항의를 했지만 여전히 이 부분은 들어 먹히지 않고 있다.
더욱이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엄마의 거짓말이다. 몇 년 전에 엄마를 모시고 여동생과 나와 남편, 이렇게 넷이서 일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여행은 엄마와 함께 한 첫 해외여행이었다. 또, 외국에 사는 여동생이 잠시 입국했을 때 함께 한 데다 여러 가지로 그 의미가 남달라서 참 좋았다.
그런데, 그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내가 친정집에 갔을 때 적잖이 놀랄 일이 있었다. 바로, 동네 엄마친구들이 내게 한 말 때문이었다.
"아이고, 너그 엄마가 일본 댕기 와서 그리 좋았다고 자랑하더라!"
"참 잘했다! 너그 엄마 얼굴이 확 핐더라!"
"우째, 다들 시간을 내 가지고. 아들 딸들이 다 같이 모시고 댕기 왔노!"
"네??? 아... 네... 하, 고맙습니더!"
그랬다.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딸들이 아니라 아들이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온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것도 함께 모시고 간 사위는 어디로 쏙! 빼 버리고, 그 말을 같이 듣고 있는 남편에게 너무 부끄러워서 숨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자랑하듯이 말했다고 하니 내 마음속으로는 약간 놀라는 것을 넘어서 기가 찼을 정도였다. 그때 든 생각이다.
'아들이라니! 지는 여행을 그렇게 많이 해외여행을 다녀도. 단 한 번도 엄마 모시고 여행을 갈 생각조차 안 하는 아들을!'
그래도 나는 엄마의 거짓말을 좋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그 거짓말을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 엄마라서, 내 엄마가 한 거짓말이라서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이다. '어쩌면 엄마는 그런 아들에게 신호를 보낸 게 아닐까? 그렇게라도 해서 엄마는 딸들이 아닌 큰아들이 자기를 모시고 여행 가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야, 니 어찌 지내니? 니 엄마 모시고 여행 좀 다녀와라!"
"어? 누나! 갑자기 왜?"
"엄마가 동네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했더라! 아들이 자기 모시고 일본 갔다 왔다고!"
"어... 누나... 내가 그리 할게..."
결국, 얼마 후 큰 남동생은 엄마를 모시고 단 둘이서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다. 우리는 그렇게 엄마 거짓말이 참말이 되도록(?) 만들었다. 나는 엄마여서 그래도 또 괜찮았지만 그런 시어머니를 보고 며느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나는 엄마를 통해서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 관점을 많이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어머니 노릇 어찌하냐'라고 묻는 말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명쾌하게 말한다.
"울 엄마 반대로 하면 괜찮을 것 같아!"
어제 교회에서 며느리 장민이를 만났다. 내일 그러니까 오늘 아침 며느리가 베트남으로 출장을 가기 때문이다.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장민이를 살짝 안아주며 나는 흰색 봉투 하나를 쥐어 주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돈이 없지만 베트남은 줄 수 있겠더라고! 미국이었음 못 줄텐데. 호호호!"
"아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10일이니까 하루에 만 원씩이야! 40도라는데, 아이스크림 사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