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적 사랑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아가페적 사랑의 가르침은 실천으로 이어지기 어려워보인다. 분명, 우리는 살아가며 나와 결이 매우 다른 사람을 대면하게 되고, 이 때 나와 전혀 다른 존재로서 수용하기보단 나의 삶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이한 윤리관을 갖고 있다던가, 도덕의식이 결여됐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려는 개인의 처절한 노력은 덧없고 무의미하다고까지 여겨진다. 타인을 수용하는 것, 모든 타인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상투적인 말을 여기에 적용하기엔 꽤 사변적인 주장이다.이미 아가페적 사랑이 좌절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겠는가. 성경의 말씀은 모범이지, 규범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혐오하는 나를 정당화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사랑하지 못할 누군가는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선이라는 개념이 있고, 그 선을 넘어 절대 애정을 갖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몇 있다. 그런 내 모습을 성찰할 때마다 괴롭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 내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인간됨'을 배우기 위함이라 - 가끔은 그 사람을 증오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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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컵에 떠다니는 찌꺼기를 바라보다, 나는 욕망과 생각의 분리를 떠올린다. 그것은 마치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경험하는 ‘나’와 ‘이상적인 나’ 사이의 분리처럼 느껴진다. ‘자아’란 수많은 타자와의 동일시 경험에서 생성된 이미지이며, 자아의 경계를 명확히 긋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무의식이라는 담론을 통해 타자와 나의 구분이 혼연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성인이 되려는 나의 노력에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또한 깨닫게 된다. 성인, 혹은 대인배라는 존재는 타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통해서만 마주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성인이란 사유의 균열 속에 존재하는 자이다. 하나님 곁에 도달하여 박애주의자로서의 나를 꿈꾼다는 것은, 말씀을 공부하고 내면화하여 박애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 감춰져 있던 균열을 직면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박애는, 하나님이라는 일자가 타자에게 내리는 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무너뜨리며 기도하는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균열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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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사변적인 글을 쓴다 한들,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돼 주장하고 싶은건 '나'에 대한 반성이다. 누군갈 미워도 해보고, 좋아도 해보는게 청춘이라지만, 나는 그 정도가 지나치게 깊은 것 같다. 증오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고, 그 사람을 수용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무한히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항상 내 곁에 두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