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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들로 다시 그려보기

by 결 디자이너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늘 정체성을 묻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이 조금 얕다고 느낀다.
좋아하는 것은 그날의 기분, 날씨, 마음의 상태에 따라 쉽게 달라진다.
때로는 피곤해서 선택한 음식이 잠시의 ‘좋아함’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우연히 들은 음악이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날의 컨디션과 날씨, 기억의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 말고

내 안의 오래된 무늬 같은, 뭔가 더 근본적인 것이 있는데

그걸 ‘좋아한다’라는 말로 다 담기엔 표면이 얇은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조각에 가깝다. 그 조각들은 내 안의 더 깊은 곳—

결, 기억, 감정의 떨림—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다.

누군가는 밝은 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밝음이 왜 필요한지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이들과의 시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시간에서 무엇이 자신을 다시 살게 하는지까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묻는 질문은 정체성의 가장 얇은 표면만을 건드린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좋아하는 것’을 조각조각의 목록으로 말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기다움'이라는 단어를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사실 취향의 조각이 아니라 결국 ‘나라는 존재의 결’로 모이는 것들이었다는 걸


나는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좋아한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촉수를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들.
딸의 말이 가슴을 스칠 때,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다 잠시 멈춰 자기 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그 정적의 순간.

아이의 그림을 엄마에게 읽어줄 때 엄마의 흔들리는 눈빛.

지하철의 투명한 창에 새겨진 글귀가 마음에 쏙 박힐 때,

그 조용한 울림 속에서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감각을 느낀다.


감정은 나에게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해마의 응급처치에 가깝다.

감정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시작된다.
뇌의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떨림이 먼저 일어난다.
편도체가 먼저 반응하고, 그 떨림이 “지금 어떤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알려준다.

그다음에는 해마가 조용히 움직인다.
해마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지금의 감정과 닮은 장면을 꺼내 연결한다.
그래서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기억과 현재가 다시 만나는 순간이 된다.

나는 이 과정을 ‘해마의 응급처치’라고 부른다.
감정이 갑자기 치고 올라올 때, 해마가 낡은 기억을 꺼내고

그 기억을 새롭게 정리해 나에게 건네는 느낌이 있다.


감정 하나는 색 하나를 불러오고, 색 하나는 기억을 깨우고, 기억 하나는 나의 선을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단순히 ‘느낀다’고 말하기보다 감정이 내 안에서 어떤 결을 만들고 있는지
그 흐름을 살피는 편이다.


색도 그렇다.

나는 예전엔 색을 ‘소재와 상품’으로 다루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색을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언어로 바라본다.

나는 색 자체보다 색이 불러오는 감각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떤 색들은 오래된 기억을 데리고 오고,
어떤 색들은 기도를 부드럽게 감싸고,
어떤 색들은 아직 말로 설명되지 않은 나를 먼저 알아본다.


거꾸로 드로잉도 그렇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왼손으로 그리는 선, 끊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
지우면서 드러나는 선의 결, 종이죽의 물성, 텍스쳐가 살아나는 질감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의 감각을 깨운다.

나는 ‘잘 그린 그림’보다 ‘살아 있는 선’을 더 좋아한다.

보이지 않던 감정이 선과 색으로 모습을 갖추는 순간, 나는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숲.

숲은 나에게 장소가 아니라 상징이다.
감정의 숲, 기억의 숲, 창조의 숲.
아이의 속도와 나무의 속도가 닮아 있는 그 깊은 시간.
자연의 결, 나무의 껍질, 햇빛의 층위, 이 모든 것이 내 세계관을 만들어왔다.


사람과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말하지 않고 남겨진 사랑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다.
딸과 엄마 사이의 미묘한 온기, 누군가가 설명하지 못한 고마움,

상처 때문에 말하지 못한 마음, 그늘 같지만 깊은 색을 가진 감정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색 곳곳에 이런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그리고 아이들.

아이의 표현에서 나는 항상 ‘본질’을 본다.
어른들은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아이는 감정을 먼저 그리고 속도를 먼저 드러낸다.
그런 아이들은 나에게 늘 세계의 첫 언어를 보여주는 존재다.
그래서 내가 만들고 싶은 크레용숲의 세계관은 아이들의 속도와 감정,

그리고 아이들의 본질적인 ‘있는 그대로’를 중심에 둔다.


마지막으로 창조·쓰임·성장. 나는 이 세 단어를 인생의 방향타처럼 붙잡고 있다.

창조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힘,
쓰임은 그 발견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순간,
성장은 그 과정에서 내가 더 깊어지는 기쁨.

취향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인생 후반부의 나를 이끌어가는 가치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결코 우연한 취향이 아니고

하루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먹고 싶은 음식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존재의 결에서 흘러나와 내 세계관을 이루고 내 삶을 견디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는 힘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내 안의 결을 드러내는 조용한 신호들이다.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다시 나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다시 그려본다.

아주 작은 감정 하나, 색 하나에서부터.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좋아하는 ‘대상’보다

그 대상이 나에게 일으키는 ‘결’과 ‘반응’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어떤 순간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가, 무엇이 내 안의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가,
어떤 감정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의 골조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요?’라는 질문보다
‘무엇이 당신을 다시 그리게 하나요?’라는 질문이 훨씬 더 정확한 정체성의 문을 연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질문을 바꿔본다.

당신을 다시 그리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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