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끼색, 멈춘 듯한 생명감
어느 날 문득,
마음이 텅 빈 연못처럼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데
그저 멈춰 있는 듯한 상태.
김학철 교수는 말했다.
“행복감만으로는 인생을 맞설 힘이 없다.”
그 말에 괜히 마음이 걸렸다.
그래,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맥락이 없는 시간 속에 있다.
막연함은 생각보다 더 구체적인 감정이다.
삶의 맥락을 놓쳤을 때 올라온다.
과거는 분명히 있었지만,
현재는 버티는 중이고,
미래는 아직 상상되지 않을 때.
그럴 때 우리는 무의식처럼 묻는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땐,
2층 창밖 나무의 흔들림조차 예뻐서
초록빛 사진을 몇 장이고 찍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그 풍경은 그저 ‘다 똑같은 초록’으로만 느껴졌다.
감각은 살아 있었지만,
의미는 사라져 있었다.
아마 그게, 막연함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감정이 이름을 잃었을 뿐이다.
막연함은 방향이 흐려졌다는 조용한 신호다.
불완전하지만 정직한 감정.
그날의 나는 회색빛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아래엔
이끼색의 감정이 자라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 있는 감정.
말은 없지만 “여기 있어도 괜찮다”라고
속삭이던 감정.
그런 감정은 혼자 두면 자라난다.
막연함은 갑갑함의 친구다.
둘이 함께 붙으면, 어느새
화의 스위치가 눌려진다.
그날도 그랬다.
신랑의 씹는 소리가 괜히 거슬렸고,
밥 먹고 누워 유튜브 보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결국 터뜨렸다.
“도대체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어?
미래 공부는 안 해?”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 요즘 너무 막막해.”
그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막연함은 목표가 없는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는 몸의 감각이 무너졌을 때 올라온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나는 작고 구체적인 일부터 시작해 본다.
늘 김치 하나만 올리던 식탁에
김치전을 부치고, 두부김치를 곁들이는 일.
냉장고 안의 김치에
밀가루 한 숟가락을 더해보는 것.
불을 켜고 부침을 하는 동안,
기름 냄새가 현실을 데워준다.
그건 어쩌면,
‘내 안의 무기력’에게 보내는
작은 예술 행위 같은 것이다.
“나, 아직 무너지지 않았어.”
그 말 한마디를,
나는 부침개에 담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당신의 마음엔 어떤 감정들이 자석처럼 달라붙고 있나요?
그 감정이 말로 나오지 않을 땐, 어떤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나요?
�️나는 아직, 나를 그리고 있는 중입니다.
감정 리추얼 제안
오늘의 감정요리: 김치전
김치 + 밀가루 + 달걀 + 파 + 나
막연함을 ‘뒤집고, 익히고, 노릇하게 굽기’
감정은 언제나 방향보다 온도가 먼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땐, 손을 움직이는 일부터.
오늘의 색 – 이끼색
멈춰 있는 듯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감정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