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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색도 나의 일부다

색은 마음이 입은 그림자

by 결 디자이너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늘 회색빛 아파트가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의 부천 아파트는 회색빛이었고

콘크리트 벽면에 크랙처럼 박힌 시간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전학간 목동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5층짜리 정우연립. 그곳의 기억의 시간은 더 탁해져 회색빛에 붉은 기운마저 감돈다.


그때의 나는 ‘색’이 없는 아이였다. 아니, 색을 숨기고 사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였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하루의 공기가 변하고, 아빠의 발소리에 따라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나는 내 감정을 맨 앞에 세우기보다
주변의 색깔에 조용히 녹아드는 아이였다. 그래서 회색이 나의 기본값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회색은 지우고 싶고, 기억 속에서도 특별히 잡히지 않는 색.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마음이 스스로 선택한 위장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에서야 그 말을 꺼낼 수 있다.

'색은 마음이 입은 그림자다.'


그때의 회색은, 나의 마음이 그늘진 곳에서 입고 있던 감정의 외투였다. 소리를 줄이고, 숨을 얕게 쉬고, 감정이라는 것이 없어도 되는 듯 가장하며 하루를 조심스레 통과하던 날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그 회색빛을 다시 꺼내어 바라본다. 그림자라고 다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그림자는 나를 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보호해주던 외피였다는 것을.


그때의 회색은 슬픔을 삼키는 법, 불안을 눌러 앉히는 법, 기다림을 배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나는 회색을 피하지 않는다. 그 회색 속에서 자라난 마음이 나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말이다.


싫어하는 색도 나의 일부다. 회색이 그러했고, 지금도 가끔 그 빛 아래로 돌아가 조용히 나를 안아줄 때가 있다. 지금의 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때로는 칠하고, 때로는 지워보기도 하며 조금씩 나를 그려나간다.


나는 아직 나를 그리는 중이고, 그림자였던 색조차도 이제는 나의 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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