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분홍색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분홍색이어야 했다.
여자아이니까 분홍색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민트색에 끌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시원한 그 색깔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네이비 블루를 가장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색의 변화는 곧 내 마음의 변화였다.
색채심리학에서는 좋아하는 색을 '마음의 지문'이라고 부른다.
지문이 각 사람마다 고유하듯이, 색채 선호도도 개인의 독특한 심리적 패턴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색깔 취향의 변화를 되돌아보니,
내 내면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분홍색은 사회적 기대에 맞추려던 나의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다운 것, 예쁜 것, 귀여운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분홍색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색깔을 선택함으로써 안전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된 후 민트색에 빠졌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불안함이 공존했던 때였다.
민트색의 시원함과 부드러움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색채심리학에서 초록계열은 균형과 조화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안정감을 갈망했던 내 마음이 민트색을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네이비 블루.
이 색을 좋아하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깊고 차분한 이 색깔이 주는 신뢰감과 전문성이 좋다.
파란색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안정감과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치열한 사회생활 속에서 내적 평온을 찾고자 하는 내 마음이 이 색을 선택하게 한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내 옷장의 변화다.
예전에는 화려한 색깔의 옷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네이비, 베이지, 그레이 같은 차분한 색깔들이 대부분이다.
친구들은 "요즘 너무 무난하게 입는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색깔들이 진짜 나를 표현하는 것 같아서 편안하다.
때로는 예전에 좋아했던 색깔을 다시 선택하기도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밝은 노란색 소품을 사거나,
무기력한 날에는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기도 한다.
색채심리학에서 노란색은 긍정적 에너지를, 빨간색은 활력을 의미한다고 하니,
내 무의식이 필요한 감정을 색깔로 보충하려 하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해진다. 10년 후의 나는 어떤 색을 좋아하게 될까?
아마도 그때의 색깔 선택 역시 그 시점의 내 마음을 정확히 반영할 것이다.
색깔 하나하나가 내 성장의 발자취가 되고,
내 마음의 변화를 기록하는 일기장이 될 것이다.
좋아하는 색이 마음의 지문이라는 말이 이제야 실감난다.
지문처럼 고유하지만 동시에 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색채 선호도의 특별함이다.
내가 선택하는 색깔들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내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오늘도 나는 색깔로 나를 표현한다. 네이비 블루 셔츠를 입고,
베이지색 가방을 메고, 핑크색 립밤을 바르면서.
이 모든 색깔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 색깔들은 분명 내일의 나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색깔이라는 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