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올 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굴을 마비시키는 차가움으로 다가온다.
최근 한 강의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재미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패션계에서 일하던 사람인데요. 최근 1년간 옷 한 벌도 사지 않았어요.”
“어머, 어떻게 그랬어요? 그쪽에서 일했다면 되게 관심 많으실 것 같은데.”
강사분은 내가 예상했던 반응의 말을 했다.
그런데 문득, 나도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0년을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옷과 원단을 만지며 살아온 시간이 무색할 만큼,
예전의 그곳에는 발길이 닿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필요한 옷은 예전에 회사에서 입던 뾰족한 신발이나,
키높이 운동화, 종류별 정장 재킷, 바지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트렌드에 맞춰 매일 새로운 착장을 보여주던 그 시절의 옷들은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았다.
외부 워크숍을 나갈 때면 핏이 잘 맞는 검정 턱바지와 핑크색 셔츠 한 벌이면 충분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는 물감이 묻어도 상관없는 운동화와 면바지, 캐주얼한 티셔츠면 됐다.
이 스타일이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이 착장만 입게 되니,
드디어 콘셉트를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옷을 입는 습관은 단정해졌고, 심플해졌다.
검정 정장과 검정 목폴라만 입었다는 스티브 잡스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입는 나의 습관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다.
나의 시선이 외면에서 내면으로 이동했다는 증거였다.
패션계에서 일하던 시간은 언제나 트렌드의 중심을 좇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레이스였다.
눈앞의 목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달렸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조정하고 수정하며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옷과 원단을 만지고, 디자인을 고민하는 순간조차도 결과를 위한 과정으로만 소비되었다.
패션계에서 내가 만드는 것은 옷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만든 옷이 쓰레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옷은 그저 버려질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우리 브랜드 옷을 좋아했다.
“이 옷은 선물하고 싶은 옷이야.” 라는 말을 들을 때는 뿌듯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옷이냐?”
의미 없이 만들어낸 작업들은 그 비난을 견디기 어려웠다.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만들어내는 것에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달리기를 할 때 우리는 어디서 멈출까. 대부분은 골인지점에서 멈춘다.
20년 동안 나는 패션계라는 긴 마라톤을 달렸다.
그 마라톤의 목표점은 ‘실장’이라는 자리였다. 신입 시절부터 꿈꿔왔던 위치.
나는 그 골인지점에 도달하기까지 8년이 걸렸고, 그 자리에 머문 시간은 12년이었다.
왜 그렇게 오래 머물렀을까?
설익게 도달한 목표를 더 단단히 익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찰진 실장이 되고 싶었고, 단단한 실장이 되고 싶었다.
나는 완벽한 실장이라는 결실을 만들고 싶어 온 힘을 다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나를 가다듬고 키우며 버텼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다음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까지면 됐다.’는 생각이 서서히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스무 번의 사계절을 보내며 키워온 나무가 새로운 잎파리를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두빛 새싹의 감각을 원했지만, 내가 피워내는 것은 낙엽처럼 퇴색되어 있었다.
그토록 애쓰며 피워낸 결실이 말라비틀어진 낙엽이라면,
내가 있는 이 땅은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는 땅일지도 모른다.
이 숲은 더 이상 내게 연두빛 감각을 줄 수 없었다.
서늘한 기운만이 남았다.
내가 서 있는 이 숲은 더 이상 나에게 생기를 주지 못했다.
내 마음은 다시 날고 싶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날아가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로 뛰어야 할까?
달릴 준비는 되었다고 느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것처럼, 막막했다.
‘기다리면 안개가 걷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지만,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길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달리겠다고 묶었던 운동화 끈은 점점 느슨해지고,
나는 슬며시 운동화를 벗었다.
운동화 끈을 다시 단단히 묶고, 어디로 달릴지 고민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러나 같은 바람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단단해진 사람에게는 그 바람조차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느끼던 서늘함과 차가움은 바람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바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맞서 싸울 힘도, 그 바람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힘도 없었다.
주저앉기 전에 멈춤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었다.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열정 가득 달리기를 원했던 마라토너에게 달릴 경기가 주어지지 않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보통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량을 갈고닦으며 기다려라.”
그러나 그 말은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나 유효한 말이다.
문제는, 나는 더 이상 마라톤 경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라토너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더는 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옷을 벗어야 했다.
사람들이 나를 ‘마라토너’로 보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나는 패션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다른 방식으로 내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바람을 견디는 힘이 아니라,
바람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는 힘을 키우기로 했다.
멈춤이라는 선택은 나를 다시 발견하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나의 색을 찾기 위해서라면,
멈춤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일정을 맞추거나, 트렌드를 분석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
마치 방치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토록 바쁘게 달리던 걸음을 멈춘다는 것은
단지 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멈춤이었다.
멈춤은,
내 안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방법이 되었다.
옷을 사지 않게 된 이유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싶다는
내 안의 목소리가 시킨 일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