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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Dec 25. 2020

우리의 업무는 지출이 반이고 전화가 반이야

지출



내가 갓 공무원이 되었을 때, 내 사수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업무는 전화가 반이고 지출이 반이야"

그렇지만 지금의 학교에서 실장이 되어 근무하기 전까지는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학교의 막내에서 급여, 물품, 재산, 재난, 시설 등등의 업무만 해왔기 때문에 한정된 사람들을 대하고 지출도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출은 말 그대로 돈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 가계에서 돈을 쓰듯이 공공기관에서도 늘 돈을 쓴다. 모든 건 돈을 써야 굴러가니까.)


그런데 진짜 실장이 되어 학교 행정실 업무의 중심에 서있다 보니 이제야 7년 전 사수의 말을 가슴으로 실감하게 된다. 학교에서 지출담당자가 되니 정말 다양한 업체의 대표님, 직원분들, 그리고 교육청 담당자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해야 하고, 그 소통의 수단이 전화이다 보니 정말 근무시간의 절반 정도는 전화하다가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남은 시간은 계약하고 지출하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그중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업무인 지출이다. 학교 돈을 쓰는 것이다. 열심히. 불용액은(쓰이지 못한 돈) 최소한으로 하되 최대한 낭비되지 않는 방향으로 돈을 쓰는 것이 나의 올해 목표이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외부 활동과 행사가 취소되면서 의도치 않은 돈들이 제 갈길을 잃어버려 불용률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속상하다.)


지출의 순서는 이러하다.

1) 예산의 담당자가 품의를 올린다. (품의란, 결재권자에게 이 예산을 이렇게 쓰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절차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2) 품의 결재가 나면 지출담당자는 원인행위를 한다. (원인행위란 계약 체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3) 원인행위가 결재가 나면 지출담당자는 계약상대자가 계약사항을 완수할 때까지 기다린다.

(계약사항이 공사이면 준공검사를 통과할 때까지, 용역이면 이행사항을 완수할 때까지, 물품이면 제대로 납품될 때까지.)

4) 계약사항이 완수되면 담당자는(품의를 올린 사람) 검수를 한다.

5) 검수에서 이상이 없으면 지출담당자는 관련 서류를 받고 돈을 송금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품의-원인행위(계약)-완수-검수-지출 정도가 되겠다. 정리해놓으니 참 간단한 것이, 직접 해보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나 같은 경우에는 인건비 지출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출을 나 혼자 다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지출이 많은데, 지출이 유독 몰리는 시기가 있으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출 한건에 보통 서류가 기본 5장 이상이고, 조금이라도 큰 계약이면 정말 서류가 한 뭉치이기 때문에 내 책상에는 늘 서류가 쌓여있다. 품의서는 품의서대로, 견적서는 견적서대로, 납품서는 납품서대로, 서류를 종류별로 쌓아놓고 싶은데 내 책상이 그렇게 넓지 않기 때문에 한 지출건에 관련된 서류는 일단 순서 생각하지 않고 모아서 클립으로 묶어놓고, 그다음 지출도 그런 식으로 해서 문서를 켜켜이 쌓다 보면 정말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서류 탑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품의만 결재 난 건, 원인행위까지 결재 난 건, 카드 지출 건, 서류가 다 들어온 지출건, 아직 미비한 서류가 있는 건 등등 분류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정말 학교에서의 시간은 어찌나 빠른지 어? 하면 점심시간이고 어? 하면 퇴근시간이다. 근무시간은 남들과 똑같은 8시간인데(아, 나는 7시간이다. 육아시간을 아침에 1시간씩 쓴다. 아이들 등원 때문에) 어째 체감 시간은 한 4시간 정도 되는 듯.


여하튼 그래서 결재를 기준으로 폴더를 만들어놓고, 다른 건 다 찾아보기표로 처리한다. 이렇게 챙긴다고 챙기는데도 완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완벽이라는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법에서 받으라고 규정해놓은 것은 다 받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깜박깜박한다. 그런데 또 참 이상한 건 그렇게 깜박한 서류들이 점심 먹고 양치하다가, 퇴근길 운전하다가,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생각이 난다. 그러면 자리로 돌아와서 바로 체크하고 채워 넣는다. 조금 타이밍이 이상하긴 해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생각이 나면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지출을 하고 한 달이 지나면 지출증빙서를 묶는다. 사실 한 달치를 바로바로 묶으면 그게 가장 이상적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사실 부족하고, 두 달에 한번, 세 달에 한 번씩 묶는데 그러면 한 달에 지출이 많은 달은 높이가 4cm짜리 증빙서가 두세권 나오고 없는 달은 2cm나 3cm 정도 되는 증빙서가 1-2권 정도 나온다. 그리고 캐비닛에 월별로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문서행정이라는 건 지출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할 정도이다. 정말 행정실에 있는 캐비닛의 절반 정도를 지출증빙서가 차지하고 있다. 정말 어마 무시한 양이다.


이 글에 처음 나오는 사진은 내가 두 번째 토너를 갈기 직전에 찍은 사진인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찍어봤다. 9.1. 자로 우리 학교에 와서 채 4개월이 되기 전에 두 번째 토너가 바닥을 보이다니. 그래서 찾아봤다. 저 기종의 정품 토너가 하나에 몇 장을 인쇄할 수 있는지. 내가 찾아본 게 맞다면 2천 장이라고 한다. 그럼 내가 4천 장을 인쇄했다는 것인데 4천 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기분이 이상하다.

앞으로 더 몇 개의 토너를 쓰고, 몇 장의 종이를 쓰게 될까. 여력이 있다면 토너가 다 닳을때마다 세보려 한다. 


얼마 전 추경이 끝났다. 추경이 끝나면 남은 건 미친 듯이 해야 하는 지출이다. 이번 회계가 끝나기 전까지 정말 부지런히 지출해서 나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 수 있다. 초짜 실장.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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