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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y 09. 2021

검정고시를 봤다면 어땠을까

부끄러운 얘기다. 아니 부끄럽다는 표현은 좀 억울하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가끔 인간관계에서 너무 소심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피해의식이 정말 아무 때나 불쑥불쑥 고개를 들 때, 그것이 내 딸을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때 생각한다.


"검정고시를 봤다면 어땠을까?"



엄마가 집에 오셨다. 무슨 얘기 끝에 학창 시절 내가 주일(교회 가는 날)마다 그렇게도 악다구니였다는 말이 엄마 입에서 튀어나왔다. 반론을 하고 싶은 마음에 입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말을 알아듣는 다온이가 신경 쓰여 쉽게 입을 못 떼고 있는데, 엄마랑 눈이 마주쳤다.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말해도 될 때가 온 것 같다는 마음.


"엄마, 내가.."


입은 뗐는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벌써 15년이 흐른 얘기인데도 여전히 회상은 반갑지 않다. 반갑기는커녕 마음이 정말 한없이 씁쓸해진다.


"엄마, 내가.. 학교에서도 엄청 외로운데, 교회에서도 외로운 거야.."


엄마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만 할까 하는 내적 갈등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털어놓기로 마음을 굳힌다. 내가 엄마와 정말 박터지게 싸워야만 했던 이유. 주일이 돌아오는 게 그렇게도 싫었던 이유. 그 진짜 이유를.


"엄마도 알잖아, 내가 학교에서도 친구가 없고 교회에서도 친구가 없었다는 거, 친구뿐만이 아니야, 단 한 명도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사람이 없었다는 걸 알잖아."


엄마의 시선이 나를 떠나 식탁으로 옮겨졌다. 괜한 죄책감이 들지만 한번 터진 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학교는 졸업해야 할 것 같더라고. 학교는 필수지만 교회는 필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거야. 내가 주중에도 외로워 죽겠는데 굳이 주말에도 교회라는 곳에 가서 마음 붙일 사람 하나 없이 외로울 필요가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게다가 교회 선생님은 내가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마음을 못 열어서라고만 하니까. 나는 그 말이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해. 내가 마음을 어떻게 열어야 사람들이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연다고 다 해결이 되나? 내가 열어도 그쪽에서 안 열면 땡인 거잖아, 나만 우스워지는 거지"


엄마의 입술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맞지... 내가 마음을 열어도 상대가 마음을 안 열면 끝이지..."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엄마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나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이 시간. 나는 생각한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왜 학교는 꼭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지옥 같았던, 하루에도 몇 번씩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고 싶었던 그곳을 나는 왜 벗어날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 벗어나면 왜 내 인생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을까? 대체 왜 그랬을까...


같이 급식 먹을 사람이 없어서 매번 매점에서 옥수수빵과 우유로 점심을 해결해야만 했던 그곳에서. (나의 이런 모습이 안타까워 교직원들이 먹는 자리에서 같이 밥 먹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던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때도 지금도 참 어이없는 제안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 선생님으로서는 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체육 수행평가를 하는데 같이 할 짝꿍이 없어서 다른 아이들 다 끝난 후에 체육선생님이 억지로 맺어준 어떤 동급생과 같이 해서 결국 최하점을 받아야만 했던 그곳에서.


모의고사를 잘 봐서 특별반에 들어갔는데 첫날,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여있던 내 자리를 보고도 단 한마디의 항변조차 할 수 없었던 그곳에서. (특별반 소속 엄마들끼리 별도의 자모회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간식을 돌아가면서 보냈다. 우리 엄마 차례가 되어 보낸 날,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다른 동급생들은 우리 엄마가 보내준 간식을 자기들끼리 히히 호호 거리며 먹었지만 정작 나는 먹을 수가 없어 쉬는 시간 내내 자는 척을 하고 집에 와서 엄마 몰래 먹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녔던 학교 특별반에서는 모의고사 때마다 일명 물갈이(성적에 따라 점수가 하락한 아이들은 특별반에서 나가고, 잘 본 아이들은 새로 들어오는 시스템)를 했는데, 결국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진 나는 담당 선생님에게 성적과 상관없이 나를 특별반에서 내보내 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께서는 자기 믿고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쟤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너의 미래가 중요한 거라고 하며 나를 잡았었다. 결국 끝끝내 남아있던 나는 나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영어 선생님이자 한때 내 담임이었던(위에 옥수수빵 담임과는 다른 인물) 선생님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만한 성과(대학 합격)를 냈다. 그런데 그만큼의 인간관계에 대한 트라우마 또한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정말로 나는 왜 벗어날 수 없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나는 검정고시라는 시스템 자체를 몰랐다. 물론 알았어도 자퇴하겠다는 얘기는 차마 엄마에게 못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온이를 임신했을 때 교육지원청에서 검정고시를 지원하러 나간 적이 있다. 원서접수를 지원했는데 접수하러 오는 학생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학생들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정규 공교육을 벗어나 검정고시를 접수하러 온 것일까? 혹시 나같이 괴로운 학교생활을 버티지 못해서 온 학생들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한 사람 한 사람 마주할 때마다 계속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도 지긋지긋했던 학교를 벗어나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검정고시를 접수하러 오는 그 시절의 나를 상상해보았다. 단지 상상했을 뿐인데 나 스스로가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글펐다. 출구라고는 졸업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정말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버틴 10대의 내가. 급식을 못 먹어서 점심시간부터 야자가 끝날 때까지 배고픔에 몸부림치면서도 죽어라 공부해야 했던 고등학생의 내가.



언젠가 다온이 친구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다온이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학교를 버거워하면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도 생각하고 있어"


상대 엄마의 당황스러움이 휴대폰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기준이 뭔데?"


"교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선생님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뭐 학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이 모든 상황에서 다온이가 스스로 버틸 수 있으면 지켜봐 주겠지만,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면 내가 먼저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버텨서 어떤 성과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해 마음에 남는 상처나 트라우마가 다온이 인생에 평생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맞는 말이네.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맞아, 없기를 바라야지."



진짜 내가 검정고시를 봤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내 삶을 보면 그때 검정고시를 봤으면 더 잘됐을 수도 있겠다. 검정고시로 일찍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고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 봐서 들어왔으면 지금쯤이면 6급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니. 씁쓸한 웃음이 난다.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나처럼 암흑 같은 학창 시절을 버티고 있는 학생들이 있을 것만 같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학교만이 정답이 아니라고, 교우관계 문제(왕따, 학교폭력 등등)는 학교 안에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비단 교우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 관련된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미안해서, 왠지 내가 나를 괴롭히는 동급생들에게 지는 것만 같아서 이를 악물고 버티면 그만큼 너의 인생에 남는 것이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있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나는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이 안 놀아줘"라고 하는 말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진짜로 이 한마디에 담임선생님께 얼마나 많이 전화를 하고 상담을 했는지. 사실 아직도 많이 불안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올려주시는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나에게 소위 "왕따"의 아픔이 없었다면 이렇게 까지 불안했을까..)



지금의 나는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아직까지도 나의 아픈 과거가 내 소중한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있긴 하지만, 내 스스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많은 기대도 많은 실망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현재의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들이 쌓여서 다행히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가고 있다. 참 다행이다.


너무 짠한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평생을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돌봐줘야 할 나의 또 다른 동반자이다. 검정고시를 봤으면 좋았겠지. 남은 여생 내내 아쉬운 마음은 가시질 않겠지. 하지만 그것도 그 사실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지금의 내 소원은 내가 우리 아이들이 커가는 걸 지켜보면서 내 과거에 묶여 아이들을 단정 짓지 않기를, 왜곡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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