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Sep 16. 2021

등사가 내 업무예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

인근 학교 주무관님과 얘기하던 중 나왔던 얘기다. 평소에도 그 주무관님은 사고가 트여있다고 느끼고 있던 분인데, 그분이 오늘의 글 제목인 "등사가 내 업무예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등사: 대량 복사, 주로 시험지, 가정통신문 등이 해당된다.


당황스러움을 느낀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누구 업무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단 한 번도 등사가 누구 업무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으레 시설 주무관님들이 해주셨기 때문에 물론 부탁의 형식을 띠긴 했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8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다.



"등사는 누구 업무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답을 못 내리겠다. 하지만 정확한 건 그 누구도 등사업무가 시설 주무관님들의 업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등사가 시설관리는 아니니까. 그럼 대체 누구 업무지? 가정통신문이든 시험지든 결국 교육활동을 위한 업무니까 선생님들이 해야 하나? 아니면 교육활동은 아니고 교육활동을 위한 지원 업무니까 행정실에서 해야 하나? 언제부터, 왜, 등사업무는 당연히 시설 주무관님들이 하는 거처럼 된 걸까?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등사"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거쳐온 학교들 중에 단 한번, 젊은 시설 주무관님과 함께 일했던 적이 있는데 그 주무관이 다른 업무를 할 때도 지쳐 보였지만 유난히 등사실에서 등사를 할 때면 세상을 다 잃은듯한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있곤 했다. 나는 그때 당시에도 등사는 당연히 시설 주무관님들이 맡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등사할 때는 복사기가 돌아가는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뭐"


그런데 참 단편적인 생각이었다. 아마 나보다 거의 10살이 어린 그 시설 주무관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대체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등사업무는 주로 큰 학교에 있다. 내가 지금 소속된 우리 학교처럼 소규모 학교에서는 한 반에 10명도 안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인쇄할 때 아예 학생수에 맞게 하거나, 본인이 복사기로 복사를 하신다. (이런 소규모 학교에서 조차 설마 혹시나 복사해달라고 시설주사님한테 부탁하는 학교가 있다면,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30-40장 복사하는 게 많이 힘들어요? 시간 엄청 많이 들어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우리 시설주사님은 그 넓은 부지 예초하고, 전지 하고, 낙엽 쓸고, 은행이나 매실 대추 같이 영글지 못하고 떨어진 잔챙이들 치우느라 늘 힘들어요. 힘든 사람 더 힘들게 하지 맙시다.)


큰 학교의 시험기간이 되면 시설 주무관님들은 어마어마한 시험지 등사 양에 파묻혀 등사실에서 나오지를 못하신다. 본연의 업무는 뒷전이 되고 완전 시험지 등사인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등사업무라는 게 단순하게 복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사해서 학년별, 반별로 분리작업까지 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한 초등학교가 있다고 하자. 그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10개의 반이 있고, 그러면 총 60개의 반이 있다. (1-6학년). 한 반에 25명씩이라고 치면, 한 학년에 250명, 이 학교에는 대략 1500명이 있는 것이다. 그럼 한 과목당 1500장을 등사해야 한다. (저학년 고학년, 혹은 학년별로 과목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국, 영, 수는 다 있을 테니 국영수만 해도 4500장.)


4500장 다 등사해서 60개 반에 잘 들어갈 수 있게 분리. 물론 요새 복사기들은 스마트해서 한부씩 딱딱 나뉘어서 복사가 된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복사기가 지그재그로 놓아주지는 못한다. 결국 엄청난 뭉치를 들어다가 복사기가 나누어준 대로 한 부 한 부 손상되지 않게 들어서 분리하는 건 시설 주무관님들의 몫이다.  




이런 자매품은 정말 반갑지 않지만, 등사업무를 생각하다가 추가적으로 생각난 시설 주무관님들의 노고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바로 지출증빙서 묶기.


지출증빙서 묶기는 누구의 몫이지?


지출증빙서 : 지출(학교에서 돈 쓸 때)할 때 필요한 서류 및 공문서(적게는 5장에서 공사 같은 경우에는 한건에 100장이 훨씬 넘는 경우도 있다.)


누구의 몫일까? 엄밀히 따지자면 지출을 담당하는 주무관의 몫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출을 담당하는 주무관은 너무 바쁘다. 나의 예를 들면, 나는 한 달에 몇천만 원을 지출한다. (쉽게 말하자면 몇천만 원을 쓴다. 아무리 소학교여도 학교가 돌아가는 데는 참 많은 돈이 든다.) 선생님들이 돈 쓴다고 올린 서류 확인하고, 두 번의 결재를 받고, 그 사이에 업자들에게 필요한 서류 다 징구하고, 업자들에게 돈 주고, 증빙서 순서대로 정리해서 캐비닛에 착착 정리한다. 시간 날 때 해야지... 하지만 주로 시간이 없다.


그래서 시설 주무관님들이 증빙서를 예쁘기 책으로 묶어주신다. 하지만 사전작업이 필요한데, 그 달(월)의 현금출납부를 뽑아서 순서에 맞게 또 지출증빙서를 착착 쌓아서 적당한 두께로 만들어 드려야 한다. 그러면 기계(천공기)를 이용해 앞뒤에 두꺼운 표지를 대서 묶어주시는 거다. 정말 사람 좋고, 감사한 시설 주무관님은 앞, 옆 표지를 라벨지(스티커형)에 인쇄해 드리면 그것까지 붙여주신다.(현재 내가 같이 근무하는 주무관님이 그렇게 해주신다. 너무 감사하다.)


이것 역시 부탁의 형식을 띠지만 관례라는 틀 안에서 많은 시설 주무관님들이 부당함을 느끼면서 감내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지출증빙서 묶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설 주무관님께 부탁했던 내 모습을 반성한다. 더불어 앞으로는 부탁드릴 때 조금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선생님들도 등사를 부탁할 때 당연하다는 듯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주면 좋겠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충격과 무게감이 실로 가볍지 않다. 모든 시설 주무관님께 이 글로나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등사는 진짜 누구 업무인지 모르는 채로 글을 끝맺어서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벌써 1년, 혹독한 실장 돌치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