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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Oct 07. 2021

너의 이름은 "김범석"이었지

어젯밤 꿈에 낯익은 남자아이가 나왔다. 우리는 같이 교회에 갔고, 내가 교회에 적응 못하는 모습을 본 그 남자아이는 내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교회에서 나왔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이쁜 얼굴이었나."라고 말했고 나는 장난스럽게 "원래 이쁜 얼굴이었거든?"하고 받아쳤다.


 


꿈에서는 다정한 연인, 혹은 썸을 타는 사이였지만 사실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너의 이름은 김범석이었지. 잠에서 깨자마자 너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입술 사이로 "김.." "김범.." "김범식.."을 한참 중얼거리다가 생각이 난 것이다. "김범석" 세 글자. 그리고 생각나는 또 하나의 이름. "박현정"


그래 맞다. 꿈속에서 너의 손을 잡아야 할 여자아이는 내가 아니고 박현정이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아득한 어느 시절에 우리는 친구였다. 범석이는 우리 반 박현정을 수년간 짝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현정도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한결같듯이 박현정의 외면도 참 한결같았다. 그 아이는 내 옆에 서서 하염없이 박현정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김범석은 키가 작은 아이 었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매남자다운 얼굴. 박현정 역시 키가 작았다. 작은 키에 바람 불면 날아갈듯한 야리야리한 몸에, 얼굴은 창백하게 보일만큼 하얬다.  하얀 얼굴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까지 하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연락이 끊어지기 전까지 범석이의 사랑은 이어졌고, 박현정의 외면도 여전했다. 나는 그 둘이 정말 잘 되기를 바랐었고 범석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같이 마음이 아팠다. 그 아이의 마음은 아무도 채울 수 없었다. 딱 박현정이었다. 박현정만이 그 마음을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감싸 안아 줄 수 있었다.



우리의 인연이 끊어지기 전 내 생일, 범석이가 나에게 책 두 권을 내밀었다. "오페라의 유령 1,2"였다. 조금 놀랐다. 나는 평소에도 징그러울 만큼 잘 놀라지 않는다. 아니지,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난 순간 놀라지만, 그 놀람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놀라고 나는 다시 평정을 찾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런데 그날은 평소보다 오래 놀란 감정이 이어졌다. 김범석은  달에 용돈이 2 원이라고 했다. 우리가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생각은  나지만, 어느 급의 학교를 다녔던  달에 2 원은 정말 작은 돈이었다. 그런데  달을 모아  생일선물을 샀다고 했다.  두권. 오페라의 유령 1,2.


고맙다고 받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권을 사기 위해 김범석은 몇 달 동안  푼도 못쓰고 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까지 했을까. 차라리  돈으로 박현정에게 어떤 이벤트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수도 있는데. 가령 꽃다발이나, 혹은 예쁜 케이크이라도.


그날 받은 그 책은 내 친정집 책장에 여전히 나란히 꽂혀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김범석 생각이 난다. 작은 키, 다부진 몸, 남성스러운 얼굴, 까칠하고 까무잡잡했던 피부, 참 남자답다고 느꼈던 내 감정까지.



범석이가 전해준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나는 막연히 "Paris"에 대한 로망을 가졌다. 늘 죽기 전에 Paris와 이집트는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중에 Paris에 대한 로망을 가지게 한 사람이 김범석이었고,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결국 대학시절 그곳에 갔다.


Paris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 주인공 Eric을 주제로 한 박물관에 가고 싶었지만, 혼자 간 것이 아닌 데다 여행의 목적이 아닌 과제가 있는 문화탐방이었기 때문에 유명대학교들의 담당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에펠탑 보고 유괴당할뻔한 좋고도 나쁜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다.


언젠가는 다시 Paris에 가서 나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다. Eric을 주제로 한 박물관에 가서 나의 아이들에게 엄마 친구 중에 김범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삼촌이 엄마한테 오페라의 유령 책을 선물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엄마는 꼭 Paris에 가고 싶었단다. 그리고 에펠탑보다도 Eric을 주제로 한 박물관에 가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게 되었네. 그것도 나의 보물들과 함께. 김범석한테 참 고맙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학시절 미국에 연수를 간적이 있다. 학교에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선발된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보내준 연수였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뉴욕에서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을 보았다. 그때도 생각했다. 김범석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수작을 볼 수가 있었을까. 이 세상 그 어떤 연기보다도 그 당시 내가 보았던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의 Eric역할을 한 배우의 오열연기는 정말 훌륭했다. 그 당시 그 벅참을 간직하기 위해 내 나름 거금을 들여 사온 기념 머그컵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 10년 넘게 장식품으로 곱게 자리를 지키다가 이런 사연을 모르는 남편이 물을 따라먹는 바람에 이제는 사용하고 있다.


요새는 얼음이 잘 녹지 않는 보냉컵만 써서 그 머그컵을 잘 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 한잔 타서 마셔봐야겠다. 김범석을 생각하며. 오페라의 유령을 생각하며. Eric의 지고지순한 사랑만큼이나 박현정을 향한 김범석의 애끓던 사랑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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