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Apr 19. 2022

찌그러진 뒤 범퍼(1)

아직도 수리 안 한 뒤 범퍼

퇴근길, 평소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실장님, 제가 번호판도 차종도 잘 모르는데 실장님 차는 기가 막히게 알아요."

"왜요?"

"뒤 범퍼~~"

"아 크크크크크크크 내 뒤 범퍼~~"


여전히 찌그러져있는 제 뒤 범퍼, 그날의 기억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반년 전쯤 퇴근길 학교 주차장에서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당사자는 저와 복직한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았던 20대 중후반(?)의 젊은 남자 선생님.


쿵! 하는 소리에 급브레이크를 잡고 내려보니 제 차의 뒤 범퍼는 이미 처참하게 찌그러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차는 보닛이 약간 들린 상태.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 평소대로 후진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분명 백미러를 봤을 때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대체 선생님 차가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휘젓는 동안 사고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선생님들은 그저 내 뒤 범퍼를 보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떡하냐며 걱정스러운 눈빛과 표정과 토닥토닥을 해주시고 다 제갈길을 가셨습니다.


남은 사람은 사고 당사자인 나와 선생님 학교 문단속을 하시는 주무관님과 내 또래의 부장 선생님뿐이었습니다. 사실 사고가 나던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정확한 상황을 아는 사람은 저와 상대 선생님밖에 없었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남은 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제 과실이 더 큰 듯했습니다. 저는 후진을 하고 있었고 그 차는 제가 후진을 하는 것을 보고 정차를 했으나 저는 미처 그 차를 못 보고 계속 후진을 하다가 충돌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선생님이 계속 다가오는 내 차를 보고 경적을 한 번이라도 울려줬으면 부딪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경적을 울리는 게 의무는 아니니 결국 제 잘못이었습니다. 

보험 처리해줘야겠다. 아니다 돈을 줘야 하나. 어떡하지.

왜 같은 사고 당사자인 저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안 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라도 복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필 행정실장이랑 차를 박았으니 얼마나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까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다리도 풀려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사고가 처음은 아니었지만(두 번째였다.) 여전히 사고가 나는 순간에는

좀처럼 쉽게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말을 꺼냈습니다. 

"각자 보험 처리하시죠. 학교에서 서로 안 볼 것도 아니고.

사고 났을 때 아무도 없어서 목격자도 없는데 실장님이 조금 더 과실이 큰 것 같긴 하지만

경적 한 번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는데 그 부분도 많이 아쉬우니까.

아니면 실장님이 쿨하게 보험 처리하시던가요. 하하하하"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상대 선생님을 쳐다봤는데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그 선생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상관없어요. 각자 보험 처리해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퇴근시간도 한참 넘은 상황이라 일단 각자 집에 가기로 하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찌그러진 뒤 범퍼만큼이나 제 마음도 일그러진 상태였습니다.


심란한 마음으로 도착해서 주차하고 아이들을 하원 시키러 가는 길에 아는 동네언니를 만났습니다.

여차저차 설명하니 언니는 다 100% 내 잘못이라며 보험처리를 하거나 수리비를 따로 주거나 하라는 조언과 질책과 걱정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에 기운을 다 소진한 듯 피로했지만 알았다고 대답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니 남편이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말을 들은 터라 다시 한번 그 상황을 복기해서 남편에게 설명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상황. 애써 차분한 게 설명하는 저에게 남편은 이 한마디를 날렸습니다.   


"아이고 사모님 참 많이도 해 먹으셨습니다."


나의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지만 아주 가끔 정말 "남의 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랬습니다. 많이 놀랐겠다고 먼저 얘기해줬으면 어디가 덧나나. 참 야속했습니다. 

하지만 야속한 마음은 둘째치고 내일 마주할 상황이 걱정되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내일 출근해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라 합니다. 그쪽에서 보험처리를 원하면 해주고 오늘 말한 것처럼 그냥 각자 처리하길 원하면 그렇게 해주라고.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튀어나오는 것들(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