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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Apr 20. 2022

찌그러진 뒤 범퍼(2)

언젠가 수리하려나

다음날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쏟아지는 말들.


"차가 왜 그래?"

"아이고.. 저 정도면 한 20만 원이면 퉁치겠구먼"

"보험 처리해"

"선생님 차는 멀쩡해 보이던데"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물론 다들 악의 없이 한 말이고 일부는 저를 위해 한 말이었겠지만

이미 전날 밤에 잠을 설친 터라 신체적으로도 엄청나게 피곤한 상태에서 쏟아지는 말들에 마음까지 짓눌리는것 같았습니다. 


사무실에 저벅저벅 들어와

또 차에 대해 한바탕 얘기를 하고 듣고

자리에 앉으니 사내 메신저에 그 선생님이 온라인인 게 보였습니다.


흠. 어떻게 해야 하나?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선생님은 수업 때문에 오전 내내 교실에 있을 테니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내가 올라가야 하나.

교실에 올라간 게 언제 적이던가.

몇 번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행정실장"이라는 직위 때문에

어쩌다 올라가면 선생님들이 행정실까지 꼭 따라 내려오는 것 때문에

(마치 데려다주듯이)

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올라가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꼭 필요한 상황이니 올라가야 한다..

수업시간 말고, 쉬는 시간 말고, 가장 적당한 시간에..

점심시간에.....


 


. . 갔. 습. 니. 다.

다행히 교실에 학생들도 없고 선생님만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께서는 교탁 의자에 앉아계시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정말 벌떡.

실제로도 제가 교실로 가면 대부분의 젊은 선생님들은 진짜 벌떡 일어나십니다.

나이 불문. 학년 불문. 담임과 부장 불문.

빛의 속도로 일어나느냐, 천천히 일어나느냐의 차이는 가끔 있지만

여하튼 대부분 일어나십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조금 속상하구요.


물론 관리자(라고 하기에 조금 민망해도 어쨌든 관리자)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고

웬만한 일 아니면 교실에 오지 않는 행정실장이 무슨 일이지? 하는 마음일 수도 있지만

그냥 기본적으로는 저라는 사람을, 제 직위를 불편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하긴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저도 경력이 10년이 다 되어가도 교장선생님은 불편하니까요.


게다가 이 선생님은 경력도 몇 년 되지 않은, 복직한지는 더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니

제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상냥하고 웃는얼굴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제 차.."

"아 그거.."

"어떻게 수리할까요?"

"저는 수리 안 할 거예요."

"....?"


단호한 말에 약간 당황했어요.


"저는 이전에 크게 사고를 낸 적이 있어서 더 이상 보험 처리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수리 안 할 거예요. 실장님이 실장님 차만 수리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미 이 선생님은 각자 보험 처리하는 걸로 잠정 결론을 내린듯 보였습니다. 


"아니, 나도 사실 교직원들끼리 사고 난 건 처음이라 우리 남편한테 상의를 했더니

선생님이 원하면 보험 처리해주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그게 맞는 것 같고."


"아, 아니에요. 어차피 차에 애정도 없고 굳이 수리 안 해도 돼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떡해야 하나. 강경하게 보험 처리해주겠다고 나가야 하나,

그냥 뜻을 따라줘야 하나. 주춤주춤. 머뭇머뭇. 어색한 1초, 2초, 3초가 흘렀다.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실장님은 차 수리하실 거예요?"

"음.."


사실 돈이 아까웠습니다. 이미 이전에 멀쩡이 주차된 남의 차를 박아서 앞 범퍼도 갈았는데

뒤 범퍼까지 갈려니 정말 돈이 어찌나 아까운지요. 길어야 5년 정도 더 탈것 같은데. 5년 더 타면 15년을 타는 건데 계속 돈을 써야 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냥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따라 내려오려는 걸 말리고 혼자 내려왔습니다.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반년째 저는 찌그러진 제 차를 끌고 다니고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무슨 일이냐, 안 고치냐, 보기 흉하다 등등 수많은 말을 듣고 있지만

그저 웃어 넘깁니다. 그저 쏟아지는 질문이나 툭툭 던지는 말들이 피곤하니

어차피 찌그러진 범퍼에 이렇게 써놓고 싶을 뿐이에요.


"박은 거 맞습니다. 안 고칠 거예요."



지금 그 선생님과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지만 서로 시간 내기가 애매하고

성별이 다른지라 둘이 밥 먹는 것도 이상해서 넘어간 게 벌써 반년이네요.

(그리고 솔직히 이제 매일 찌그러진 범퍼를 보니까 인식을 못하고 있었던것도 있구요.^^;)


외관상으로 내 차가 많이 찌그러지긴 했지만

여하튼 내가 후진하다 박은 사건이기 때문에

조만간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다 담아

선물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커다란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저는 뒤 범퍼를 고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PS. 미혼 선생님에게 기혼 행정실장이 건네기에 좋은 선물을 추천해주세요!

오해 살만한 거 말고, 상대방이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은 선에서 뭐가 좋을까요?

혜안을 주세요! ^^


다시보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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