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Aug 02. 2022

우리는 가족일까요?

시댁 계 모임

결혼 전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매년 이 모임에 와야 한다는 것을.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일 년에 하루라는 이 불편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하필 생일이었다. 7월 마지막 주 토요일. 갈까 말까를 고민했지만 결국 가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아니지, 운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조금 많이 억울한 느낌이니까 가는 것이 뒷말도 없겠고 속편 하지 괜히 안 갔다가 무슨 말들이 나돌으라고. 하는 게 더 알맞겠다. 


그렇게 출발한 시댁 계모임. 순조롭게 출발해서 순조롭게 도착했다. 일 년에 한 번 보는 얼굴이지만 그것도 연차가 쌓이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반갑지만 반갑지 않게, 친숙하지만 한없이 어색한 기분에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입장했다. 아이들은 해맑았다. 불과 1-2년 전 같이 어울렸던 모든 이들을 기억 못 했지만 단지 물가라는 이유만으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첨벙.


"사람은 낯을 가려도 물은 안 가리네"라는 가장 어른인 시할아버지의 뼈 박힌 한마디가 날아온다. 

"물 좋아해요. 하하.."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고 긴가민가한 얼굴들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한 나는 괜스레 아이들 근처에서 동동거린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남편의 처, 남편과 같은 성을 쓰는 아이들의 엄마일 뿐인 이 공간. 내가 저들의 촌수와 이름을 모르듯이 저들도 나의 이름과 촌수를 모르겠지. 우리는 이 공간에 매년 같은 시간 때에 왜 같이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아니 질문을 바꾸겠다. 같은 성씨들끼리만 있으면 되는 것을, 굳이 며느리들까지 다 소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뜰히 챙기거나 사랑을 듬뿍 얹어 자신들의 가족으로 품어줄 것도 아니면서.



멀리서 내 남편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까 뼈 돋친 말을 건네신 가장 큰 어른이시다. 계모임에서 막내 축에 속하는 남편은 이미 고기 굽는데 정신이 팔려 할아버지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 포기가 빠른 시할아버지께서는 이제 자신의 손자의 딸을 부르기 시작하신다. 내 딸이다. 


"아빠 핸드폰 번호 뭐야?"

"..."

"몰라?"

"..."


내 딸은 아빠 번호를 모른다. 언젠가 엄마 아빠 번호를 묻는 딸에게 둘 다 알려주었으나 내 번호만 외운 것이다. 아빠 휴대폰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이 민망했던 나의 딸은 가뜩이나 낯선 큰할아버지 앞에서 몸을 배배 꼬다 번뜩 무엇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당찬 목소리.


"엄마 번호는 알아요!"


하지만 금세 기가 죽는다. 시할아버지의 너무나도 반사적인 대답 때문이었다. 


"엄마 번호는 필요 없어."


굳이 저렇게 말해야 했을까. 남편과 딸 사이에 있던 내 귀에도 저 한 문장이 박힌다. 차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이 일화를 말하니 웃음보를 터트린다. 대놓고도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게 웃을 일인가. 남편조차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일화로 나는 마음을 굳혀버렸다. 나는 남편 성씨가 즐비한 시댁의 가족이 아니다. 아닐 뿐만 아니라 될 수 없다. 


그래도 해맑은 우리 딸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번에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노래를 부른다. 나처럼 이 모임에서 성씨가 다른 여성분들의, 즉 며느리들의 놀람이 느껴진다. 


"생일이에요?"

"네.. 아하하하.."

"생일날 시댁 모임에 와서 어떡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껴드는 한마디. 

"뭐 어때"

내가 우리 시가를 제외하고 이 계모임에서 가장 호의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기에 머리에 쿡 박힌다. 바로 들어오는 반박. (부부의 티키타카는 좋았지만, 아무런 위로도 아무런 감사도 전해주지 못했다.)

"어떻긴, 지랄이지, 생일날 시댁 모임은"


사실 그렇게 "지랄"이진 않았을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진짜 가족으로 생각하고 살뜰히 챙겨주거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한마디라도 해주었다면. 이 날, 내가 들은 생일에 관련된 말은 "생일에 시댁 모임에 와서 어떡해"라는 말의 두 번 반복에 불과했다. 같은 성씨의 내 남편 생일이었다면 어땠을까? 축하한다는 말이 난무했을 상황이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어쩌면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을지도 모르지.



모임 끝자락에 나의 시어머니께서 자신의 손주들과 잘 놀아준 먼 친척의 아이들에게 용돈을 건네셨다. 나도 순간 고마운 마음에 용돈을 쥐어줄까 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수많은 어른들이 보여 자제했다. 그런데 그분들의 눈에는 우리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갑자기 건네진 용돈을 바라보며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수년 동안 우리 아이들에게 천 원 한 장도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도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호의는 어디까지나 호의이기 때문에 의무가 아니며 강요할 수 있는 사항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마음 한 편 서운함이, 속상함이, 야속함이 솟구쳤다. 아이들을 처음 본 나의 지인들도, 남편의 지인들도, 하다못해 지인이라 하기에도 무안한 직장동료들도 건네던 용돈이었다. 이런 서운한 마음이 티가 났을까. 내가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우리 아이들의 작은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에 아이들에게 비눗방울과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집에 도착해서도 비눗방울에 한동안 내 눈길이 머문다. 나의 시어머님이 건넨 용돈의 반사작용이든 아니든 처음으로 느껴보는 온정이랄까. 



여기까지 실컷 험담 아닌 험담을 늘어놨으니 이제 이 모든 질문의 방향을 나에게로 향해 본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시댁 어른들의 이름과 번호를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날 생일이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줬을까? 진심이란 단어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축하는 해주었을 것이다. 이 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 아이들과 잘 놀아주던 친척 아이들을 위해 용돈 줄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내가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도 그러면서 나와 같은 이들에게 서운함을 왜 그리 깊게 느끼고 있었을까? 그날 이후로 가슴 한쪽에 무겁게 자리하던 속상함을 이제 내려놓아야겠다. 


"우리는 가족일까?"


이 질문의 답은 "아니오."다. 생물학적으로 봐도 시댁 어른들과 나는 법적 관계를 제외하면 생판 남에 가깝다. 우리 아이들은 그 성씨에 따른 피가 섞였으니 가족이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저 남편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엄마일 뿐이다. 


"우리는 남일까?"


이 질문의 답도 "아니오."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인연으로 그치기에는 그동안 쌓아온 세월과 앞으로 쌓아갈 세월이 너무도 무겁다. 



누가 그러셨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보지를 못하니 앞으로 모임에 올 때 이름표를 달고 오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그래, 내년에는 진짜 이름표를 해보자. 내가 다가가는 만큼 그분들이 다가올지 모르겠지만(내가 그것을 원하는지는 더더욱 모르겠지만) 이름표 까짓 거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그리고 내 이름표 아니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데이지야, 잘 부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