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남들 다 커피 마실 때 커피를 못 마셔서 녹차나 핫초코를 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휘핑크림을 듬뿍 올리고 초콜릿 소스를 뿌린 카페모카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한 나의 커피 생활은, 어느새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순수하게 원두와 물로만 이루어진 새까만 커피를 매일 아침마다 마시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하고 쓴, 시럽도 우유도 첨가하지 않은 커피를 떠올리면 왠지 졸음과 피로로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올리며 일을 하기 위한 연료처럼 생각되지만, 막상 내가 그 쓰디쓴 커피에 빠져들게 된 건 오히려 직장을 그만두고 몇 달 동안 삶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때였다. 간호과를 졸업하고 대학병원, 종합검진센터, 작은 의원 등 여러 의료기관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간호사로서의 삶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아니, 만족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제발 이 간호사라는 직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평생 간호사로 살 거라고 생각하면 가만히 누워서 쉬다가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이십 대 후반쯤의 겨울, 나는 어느 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다가 계약이 만료된 시점에서 더 이상 구직을 하지 않고 ‘엎어진 김에 쉬어가기로’ 결심했고, 최대한 절약하면서 퇴직금과 실업급여만 가지고 백조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가 금세 지겨워할 거라고 했지만, 백수의 삶은 내게 너무나도 잘 맞는 것이었다. 마침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종종 친구를 만나기도 하지만, 집에서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영원히 취업을 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때 집에는 본가에서 보내 준 커피메이커라는 게 있었다. 나는 카페에 가지 않고서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고, 아침엔 출근하기 바쁘고 저녁에 퇴근하면 드러눕기 바빠서라도 그 커피메이커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어쩌다 친구를 만나서 카페를 가거나 할 때만 마시던 커피를 집에서도 마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주변의 지인에게서 분쇄된 원두를 얻었고, 커피메이커의 사용법은 간단해서 어느 날 아침, 나는 무척 손쉽게 첫 드립커피를 완성했다. 시럽도 우유도 크림도 들어가지 않은 그 새까만 커피는 생각했던 것만큼 쓰지 않았고 의외로 향긋하기도 했으며, 토스트를 곁들이니 뭔가 세련된 도시인의 아침식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백수의 아침식사는 드립커피와 토스트가 되었고, 드립커피의 맛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새 빵이나 과자 없이 커피만을 즐기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커피에 빠져들었고 집에서 매일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약 8개월간의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아침에 유유자적하게 커피를 즐기는 시간을 매일 가지기는 어려워졌다. 출근길에 직장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거나 인스턴트커피를 이용해서 커피를 매일 마시기는 했지만, 쉬는 날 집에서 여유롭게 내려마시는 커피와는 너무 다른 맛이었다. 이것은 원두의 맛과 신선도, 카페 주인의 스킬이 어떠냐 와는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나는 핸드드립을 배우게 되었고, 출근하지 않는 주말은 꼭 우리 집 식탁에서 내가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주말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다. 핸드드립에 필요한 기구들을 구비했고, 내 부족한 드립 기술을 커버하기 위해 신선하고 품질 좋은 원두를 구하는 데에 신경 썼다.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한 핸드드립의 과정은 무척 번거로우면서도 즐거웠다.
원두분쇄기로 커피 원두를 분쇄할 때 퍼지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 팔팔 끓인 물이 커피를 내리기에 적합한 온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여과지에 담긴 원두가루에 물줄기가 적셔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모습, 드립포트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그 모든 과정들이, 희한하게도 5일 동안 일에 시달려 너덜거리는 내 육신과 영혼을 정화시켜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드립이 조금 서툴러도, 커피의 맛이 내릴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도, 커피잔을 다 비운 후에 아무것도 안 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온전히 나 혼자서 그 과정을 즐기고 그 향기에 취하고 그 후의 여운을 간직하면 되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아침에 직장에서 마시는, 하루의 전투를 위한 연료를 채우는 마음으로 마시는 커피도 충분히 향긋하고 맛있다. 그러나, 토요일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우리 집 식탁 위에 커피 기구들을 쪼르르 세워놓고 느릿느릿 만드는 커피의 맛은 이길 수가 없다.